피천득의 수필을 읽으면
(시) 백만년쯤잠들었다깨고싶다
<피천득의 수필을 읽으면>
피천득의 수필을 읽노라면,
흐릿하지만
소중하게 보관한 오래된
흑백 사진 한 장을 보는 듯하다
사진 속 인물 하나가 툭 튀어나와
덕수궁 오래된 돌담길을 따라
내 걸음보다 딱 두 걸음 앞서
걸어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봄이면 앙상한 가지 위 파릇한 새싹의 향연을 느끼며
여름이면 아름드리나무 사이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가을이면 나뭇잎마저 가을을 품고 물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겨울이면 흰 눈 내리는 그 길을 천천히 걸으며.
피천득의 수필을 읽으면
사계절이 내 앞에서 조용히 스미었다 사라지고
말없는 어떤 사람 하나가
사색하듯 아주 천천히 걸어가고
우리네 소소한 일상과 삶과 인생이
아주 천천히 슬쩍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는 나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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