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 지는 순간
누구나 피었다 지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영원할 것 같은 젊음도 어느 순간 익어간다. 그러면서 숙성되어 성숙되어간다.
한 아이가 내 앞에 앉아 있다. 아이의 앞에는 무더운 날씨의 땀을 식혀줄 아이스 자몽에이드가 담겨있는 투명 컵이 놓여 있다. 컵 안에는 얼음 조각들과 슬라이스로 얇게 잘린 자몽 조각이 덩그러니 얹어져 있다. 아이가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나는 컵을 바라보고 있다.
컵 안에 든 얼음조각이 시간의 흐름 속에 녹아내리며 형체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보니 문득 나의 모습과 겹쳐진다.
창가에서 보이는 2차선 도로에는 아직 뜨거운 해가 지나고 있다. 카페에 앉아 있는 나는 오후의 해가 주는 더위를 즐기며 한참을 유리컵 속 얼음조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점점 물의 수위가 올라오면서 얼음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나도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서서히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으로 육체의 변화를 찾아본다. 가만히 시선을 손으로 가지고 온다. 손등에는 작고 큰 검버섯과 잔주름들이 다투며 피어나고 있다. 아직 진행형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이유는 아직 호흡하고 있는 세포들의 감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분명 조금 전과는 다른 감각이다. 어제와 다른 육체로 이 공간에 와 있는 나를 본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은 흐르고 컵 속의 얼음은 사라져 액체로 변해있는 모습을 본다. 아이는 마지막 순간 더위를 식히기 위해 타는 목을 축이려고 컵을 들어 벌컥벌컥 남은 물을 마신다. 그 순간 존재하던 액체까지 흔적 없이 사라진다.
내 앞에는 빈 컵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누구의 관심도 없다. 축 늘어진 가죽처럼 시선에서 벗어나 내동댕이쳐진 채 뒹굴고 있다. 어느 을씨년스러운 가을날 바람결에 나도는 가벼운 마른 나뭇잎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온몸이 부서지며 사라져 버렸다.
누구나 피고 지는 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