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11. 2 일
그것으로 끝일 줄 알았다. 병상일기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일으켰겠지만 그게 끝난 블로그를 누가 찾아 주랴. 5년 간 쓴 일기 387편을 1년에 걸쳐 올린 후 든 생각이다. 아니었다. 여전히 누군가 찾아주었고 공감이 이어졌다. 지난 주에야 여전히 나의 상황을 걱정하고 궁금해 하는 분이 계심을 확인했다.
열흘 전쯤, 블로그 댓글창에서 뜻밖의 글을 마주했다. 같은 병원 같은 의사에게 친정 엄마 치료를 맡긴 분이어서 더 반가웠다. 거주지가 멀지 않으면 만날 수 있겠느냐고 했다. 다행히 한 시간 거리인 서울 분이었다. 사실 만난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그저 사정을 들어주고 궁금해 하는 것에 답해 주는 것 밖에. 그것도 지극히 개인 경험에 한정된 것을. 하지만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환자든 보호자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 심정을. 난 대기실에서 선배 환우들이 주고받는 대화마저 소중했다. 정보를 찾아 동동거리던 자식들의 몸부림과 눈물이 떠올랐다. 그녀 역시 그 마음일 것이다. 블로그 글과는 또 다른, 대면을 통해 더 생생한 경험을 어머니에게 전하고 싶었으리라.
큰 키에 예쁜 얼굴의 그녀를 이곳 전철역에서 만났다. 참 신기했다. 생면부지인데, 올린 글과 댓글이라는 매개체밖에 없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식사와 차담 동안 오간 대화에서 그녀가 왜 만나고 싶어 했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동의 하에 밝히는 그녀의 상황이다. 52세. 세 자매 중 장녀. 올해 6월, 아빠의 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81세. 혈액암이라고. 부모님은 그녀가 20대였을 때 이혼, 아빠는 줄곧 따로 살았고 폭력적인 아빠로 기억될 만큼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 자식 관계는 그런 걸까?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다, 치료해도 1년 정도라는 의사 말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했다. 미운 아빠지만 마지막 1년 보살핌을 못 해드리랴는 마음에 집으로 모셨다고. 말 그대로 '늙고 병들어' 찾아온 아버지였다.
안 좋은 일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그녀에게 닥친 시련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바로 한 달 후 어머니에게 난소암 판정이 내려졌다고. 한 지붕 아래, 암에 걸린, 30년 전 이혼한 두 부모를 보살펴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 4개월째 이어지고 있었다. 부모님 이혼으로 상처가 컸던지 막내 여동생은 아예 간병에서 빠진다고 선언했고 다른 여동생은 건강상 문제로 간병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두 병원 모시고 다니랴 세 끼니 챙기랴,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공황장애가 올 지경이라고. 게다가 어머니 역시 브라카 변이가 원인이라 자신과 아들도 검사를 해야 한다. 양성이면 생식기관 제거라는, 여성으로서 심란한 과정도 겪어야 한다. 'K장녀의 운명'이라는 말로 자신을 위로하는 그녀가 참으로 안쓰러웠다. 한편으로 화도 났다. 자식이 그렇게 애쓰는데, 혈당 수치가 높아 수술도 미뤄야 한다면서, 식사 후 소파에 바로 눕는다니? 나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3시간의 대화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렇다고 그녀가 일방적인 하소연만 늘어놓은 건 아니다. 궁금 사항을 답하면서 내 얘기도 할 수밖에 없었고 돌아와 생각하니 오히려 내게 힐링이 되었다. 나보다 훨씬 심한 어머니의 상태가 '난 참 운이 좋았구나'라는 위로를 주기도 했다. 글이 늦게 올라오거나 없는 날엔 어디 아픈가? 걱정부터 됐다고. 위로라고 건네는 친구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는 말은 나의 처음 심정과 같았다. 실제 치료 사례가 내겐 가장 큰 힘이 되었듯이 나의 일기가 가장 큰 도움이 됐다고. 내가 잘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 자체가 그녀에겐 큰 희망이라고 했다.
다음날 그녀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나의 상태를 전해들은 어머니가 아침 후 30분간 걸으셨다고 한다. 딸의 말을 듣고 눈빛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니 새로운 결심이 섰을까? 항암제 독을 배출하기 위해선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는 것, 답답할 땐 생각나는대로 무작정 자판을 두드려 보라는 권유도 실행할 거라고 했다.
참으로 대단한 SNS의 힘이다. 이 나이에도 누군가에게 쓸모있는 존재라는 것! 그것은 말로 표현 못할 뿌듯함을 선물해 주었다. 더 이상 올릴 글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블로그에 '그 이후'라는 새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조그만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재발 없이 잘 지낸다는 소식을 계속 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