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
*아이 엠 샘(2001, 제시 넬슨)에 대한 아주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게 영화에 대한 첫 기억을 꼽으라면 이 영화를 고를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아이 엠 샘>이 내가 처음으로 봤던 영화이다.
그 전에도 영화를 봤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를 '처음'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건, 정말 인상 깊게 보고 가장 오래 기억에 담아뒀다는 걸 의미하니까.
어제 새벽, 십여 년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다.
이 영화는 과거, 진로에 대한 방황이라고는 한 톨도 없던 나의 확신의 기원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법조인이 되겠다고 강하게 결심했었다.
학년이 올라갈 수록 나는 더 다양한 현실 세계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해졌다.
나는 소외계층, 사회적 약자를 돕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회적' '약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부조리해보였고, 차별을 양산하는 시스템과 치열하게 맞붙어 한발짝 한발짝 모두가 행복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가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영화 내에서 변호사가 주인공 샘 곁에서 끝까지 싸워준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가 나와 달라보이는 사람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그들을 향한 사회의 폭력에 대해 예민하게 인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영화 이전에 나의 시선이 이들을 향하도록, 더 넓게 주위를 둘러보도록 이끈 책이 한 권있다.
영화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던 건, 앞서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때 반에서 책 돌려 읽기 프로그램 같은 걸 했었다.
내 기억으로는 책 목록이 반 친구들 인원만큼 있고, 각자 배정된 책을 사와 일주일마다 한 칸 씩 당겨 앞 번호 친구의 책을 받아 읽는 식이었다.
그 때 나에게 이 책이 배정되었었다.
가정통신문을 보고 엄마가 이 책을 사주었을 때 나는 실망을 금치 못했었다.
다른 친구들 책보다 훨씬 재미없어보였고 주인공도 내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통은 주인공이 멋지고 강해야되는 데, 이 책의 주인공 이안은 그렇지 않아보였다.
투덜거리는 나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00(필자)이가 마음씨가 제일 착해서 선생님이 이 책을 골라 주신 거야.'라고.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듣는 '착하다'라는 칭찬은 행동의 방향을 결정짓는 데 영향을 준다.
나는 이 책을 여러번 읽으며 '착한' 행동이 어떤 것인지 보고 생각하고 배웠다.
정확히 어떤 부분을 배웠고, 어떤 부분이 내게 구체적인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책을 계기로 자폐를 가진 친구를 '이상하게'가 아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하다.
자폐를 가졌을 뿐이지 이상한 게 아닌데, 다른 것이지 틀린 게 아닌데 차별을 받는 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반에 자폐를 가진 친구가 있었다.
같은 동네 아파트를 살았었는데, 친하게 지내진 않았어도 놀림받을 때 대신 화를 내주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었었다.
(이 책을 계기로 그 친구가 갖고 있는 자폐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나도 처음부터 그 친구를 대할 때 편견없이 완전히 착하게 대했다고 확신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위안이라고 삼을 만한 것은 아파트에서 종종 마주쳤을 때 그 친구와 친근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상처를 준 적이 있을 것 같은 죄책감과 미안함은 여전히 갖고 있지만.
고등학교를 다른 지역으로 진학하며 자연스럽게 중학교 친구들과 연락이 끊기게 되면서 그 친구 소식 또한 들을 기회가 없어졌다.
글을 쓰다보니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어떤 공부를 하고 있을 지 궁금해진다.
작년 말에 우리 가족은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 전까지 몇 십 년 동안 같은 아파트에 살았었다.
그 곳은 도서관, 노인복지회관, 청소년수련관 등 다양한 복지 시설들이 가까이 있는 동네였고,
아파트 정문에서 3분도 안되는 거리의 버스 정류장 옆에 복지관 셔틀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그 중에는 장애인 복지관도 있어, 정류장 쪽을 갈 때 종종 장애인들을 마주쳤다.
한 번은 버스를 잡으려고 신호등을 건너자마자 냅다 뛰었다.
가는 버스에 대고 잠깐만요! 소리치며 손을 흔들고 뒤따라 뛰어갔는데 버스가 멈추지 않았다.
버스를 탔으면 모르겠는데, 못 탔으니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 때 버스 정류장에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듯한 대여섯 명의 장애인들이 있었다.
(이것도 편견이겠지만 말과 행동으로 추측했다.)
자폐를 가진 분들인 것 같았고, 그들은 큰 목소리로 손가락질하며 나를 놀려댔다.
나는 장애고 뭐고 단체로 나를 놀리는 그들에게 짜증이 났다.
안그래도 쪽팔린데 저렇게 크게 놀리다니!
뭐라 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멈춰주지 않았던 버스와 힘껏 놀리는 그들을 욕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놀리는 그들에게 자폐를 이유로 이해심을 가질 만큼의 그릇은 되지 못했다.
이렇듯 나는 자폐증을 가진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 이해한다거나, 그 사람을 특별히 배려해준다거나 할 정도로 마음씨가 고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인류애적인 성품을 지닌 사람만 차별에 맞서 싸워야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이 자폐를 가졌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못하며, 모두가 그래야 한다.
내가 남들만큼 대우받길 원하는 것처럼, 그들도 그 만큼 대우받을 자격이 있고, 모두가 그렇다.
내가 따뜻함을 베푸는 사람은 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들의 권리는 힘을 다해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안의 산책>을 읽고 자폐에 대해 알게 되고, <아이 엠 샘>에서 자폐증을 가진 사람을 돕는 변호사를 보고 꿈을 키우면서, 나는 장애 외에도 사회에 만연하게 깔린 '차이가 차별이 되는' 여러 부분들에 예민해져갔다.
사회적 약자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신체 또는 인지 기능이 다른 사람보다 약한 사람을 포함하여 정치ㆍ경제ㆍ문화 면에서 일반 주류 구성원들에게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차별을 받거나 받는다고 느끼는 집단을 아울러 이르는 말' - 네이버 국어사전
보통 예시를 들 때 여성, 장애인, 청소년, 노인을 사회적 약자 범주 안에 둔다.
여성들은 최근에야 겨우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페미니즘 운동이 널리 알려지고, 여성들이 힘있는 집단을 이루게 되면서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지금껏 시대에 맞서 힘껏 투쟁해 온 역사가 있었고, 이제서야 그 힘이 사회에 영향을 줄 만큼 커져 조금씩 정당한 대우와 권리를 되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남들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 시대에 살면서 억울한 기분을 종종 느끼며 살아왔다.
억울한 기분이라하면 내가 잘못한 게 없는게 잘못한 것처럼 몰리거나,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느낀다.
내가 종종 느꼈던 것은 후자의 경우가 대다수였다.
나는 여자다.
일년에 최소 2번은 여자라는 이유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설과 추석.
명절에 양 쪽 조부모님댁을 가면 심한 성차별을 당한다.
나한테는 상차려라 설거지해라 하면서, 내가 누워있는 남동생에게 눈치를 주면 할머니는 남자가 일을 왜 하냐면서 어떻게든 다시 앉혀놓는다.
외가에서 외숙모들이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동안 내내 tv를 봤으면서 식사가 끝난 후 그릇 하나 안치우는 삼촌들을 보고 한 마디하면 싸가지 없다고 구박을 받는다.
이건 정말 대표적인 예일 뿐이지 평소에도 가족들과 주변을 보면 성차별적 언행과 행동이 눈에 훤히 들어온다.
억울하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내 자신의 상황이 아니어도, 남들의 상황에 자주 과몰입이 되는 나는 억울한 감정을 정말 많이 느꼈다.
용산 참사를 배경으로 한 세입자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한 빈부 격차와 이를 향한 기득권층의 차별적 만행들에 대해 낱낱이 알게 되어 화가 났고,
<호텔 르완다>와 같은 영화들을 보며, 약소국을 향한 강대국의 이기적이고 착취적인 행태로 인해 피해를 입는 무고한 사람들을 보며 분노가 치밀었고,
록산 게이 작가님이 쓴 <헝거>를 읽고 숨쉬듯이 자행되는 신체 사이즈, 외모를 향한 폭력적인 시선과 행동들에 대해 폭식증과 우울증을 겪었던 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답답하고 불편한 감정을 느꼈고,
해외에서 여성들이 길에서 강간을 당하고 어릴 적에 강제로 할례를 당한다는 뉴스를 보면 눈이 뒤집혀 그 날 하루는 종일 일상생활이 어려웠고,
터키 해변에서 발견된 시리아 난민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의 기사를 읽고 집과 고향을 잃어버린 수많은 난민들을 떠돌게 만든 여러 국가들 간의 이해관계에 환멸이 났다.
쓰고 보니 '억울한 감정'이라고 묶어 설명하기가 오히려 힘든 것 같다.
어쨌든 요지는 앞서 얘기한 억울한 감정의 기원 "어떤 사람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여러 가지 상황들과 그에 대한 다양한 깊이와 종류의 감정들을 살면서 많이 느껴왔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사실들을 알고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은,
깨끗한 마음과 생각을 가졌을 아주 어릴 적에 사회적 약자를 지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
그러니까 그것이 착한 것이고, 칭찬받을 일이며, 곧 좋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받아들였고,
그러한 생각이 발전되어 지금에 이르니 나는 이미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에 심히 화가 나있는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차별을 당했을 때의 감정을 여러 모로 배웠기에 더더욱 외면할 수 없었다.
아주 예민하고 촘촘하게, '차별'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내가 살면서 당연하다고 배웠던 것들, 정말 말뿐만이 아니었으면 하는, 교과서에 나오는 '더불어 사는 세상'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세상'이 되어야 할 현실에 생긴 눈 앞의 균열들에 시선이 묶인 것이다.
윤이형 작가님의 <붕대감기>에 나온 주인공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고.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자행되어 온 여러 사회적 이슈들에 있어 예민한 감각이 열린 이상,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면 받아들이고 다루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지금껏 대담하게 사회의 차별에 대해 열거하며 분노의 감정을 피력했으나
지금의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소극적이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점점 더 사회에 대해 문외한이 되어가고 있다.
어려운 사람을 볼때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 자신에 대해 매번 자괴감만 들 뿐이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 수록 더더욱 내 자신이 작고 무능하게 느껴지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뭐라도 찾아보려는 의지를 놓지 못하는 것은, 이미 내 일상생활은 불편해져있기 때문이다.
편하면 안주했을 것이다.
만약 지금 내가 놓여 있는 상황, 현재 내 자신을 둘러싼 많은 것들, 내가 겪고 있는 여러 감정들 등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편안하고 안정되었다고 생각했다면 현재의 나와, 현재의 내 주변에 만족하고 안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불편하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면 아동 학대에 대한 뉴스가 끊임없이 나오는데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화가 나고,
누군가가 죽어야 주목하는 성추행, 성폭행 사건에도 피해자를 향한 악플이 달리는 현실에 화가 나고,
코로나 시국에 법적인 보호로부터 소외된 장애인들이 시위를 하고, 한 인터뷰에서 시끄럽게 해야지 그나마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말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프다.
영화는 현실의 한 부분을 보여준다.
나는 너무 어렸을 때, 사회적 약자를 향해 사회의 폭력이 자행되는 현실의 이면을 봤고, 그때부터 모든 것을 외면하기 힘들어졌다.
<아이 엠 샘>으로 시작해 이후 많은 영화들과 책들을 보고 자랐다.
그 과정에서 위와 같은 사회의 한 모습에 더 시선을 두고 주목하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예민한 감정을 갖게 되었으며, 매 순간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 될 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나는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제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닌 만큼 한 문장 한 문장 신중하게 쓰려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만한 표현을 사용했거나,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여겨지신다면 댓글로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한 층 더 성숙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