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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뉴 Feb 06. 2019

아이와의 전쟁

아이들과 이렇게 전쟁하고 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한 단체에 후원을 받으면서 자랐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캠프에 지속적으로 참석했었다. 그 결과 나는 그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고, 벌써 4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내가 참여했던 캠프는 일종의 수련회와 비슷했다. 예전에 중, 고등학교 때 갔던 2박 3일의 짧은 수련회 말이다. 방향이 바뀌었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과한 느낌이 들지만, 현재 우리는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캠프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몇 년 동안 '센터', '방과후학교', '방학 캠프'를 운영하다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제주도로 옮겨왔다. 지금은 1년제 대안과정을 하고 있다. 1년제 대안과정이라 함은 초6, 중3을 졸업하는 아이들은 다음 학교로 올라가지 않고 1년 동안 기숙하면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준비시킨 뒤 학교로 올려 보내는 과정이다. 또한 1년에 두 번 있는 방학을 이용하여 한 달 혹은 두 달 간의 캠프를 진행하고 있으며, 매주 토요일을 이용하여 학부모 교육과 아이들의 성품을 교정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우리가 꿈꾸고 있는 것은 대안학교이며, 머지않아 그 꿈이 이뤄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아이들이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뛰어난 인재로 자라길 원한다.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미 공교육은 무너졌고, 그로 인해 여전히 사교육이 여전히 판을 치니 이 나라에 정말 뛰어난 인재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 



  대다수의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성적에 관심이 많다. 이 나라의 문제는 거기서 출발한다. 교육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는 나라들을 살펴봐도 성적에 대해선 단순 수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들은 결과보단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늘 100점이 아니라도 그 아이는 늘 잘한 아이가 된다.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를 그들의 나라와 단순 비교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교육에서라도 결과보단 과정을 중시하는 그들의 마음가짐을 배워야 한다.


  다음으로 그 나라들은 아이들의 인성 혹은 성품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룬다.(나는 이제 인성보다는 성품이라는 말로 쓰겠다) 체육과목의 이수시간도 철저하게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성품 교육에 굉장한 시간을 투자한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가? 성품이 문제이다. 성품이라 함은 엄청 대단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아는 것과, 나 역시 가치가 있으니 타인 역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존재인지도 모르고, 따라서 타인에 대해 존중하는 것도 못한다. 타인을 존중한다는 건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겐 불가능한 미션이 된다. 


규칙을 잘 지켜야만 이 놀이의 승자가 된다.


  아이들의 상태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수업 시간에 조는 것은 태반이고, 인사도 잘 안 하며,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0'으로 수렴하듯 말하고, 앉아 있는 자세, 먹는 습관, 공부하는 자세 등등 이미 전반적으로 아이들의 성품에 영향을 줄 만한 것들이 무너졌다. 당연히 학습을 하기 어렵다. 학습을 하기 위해서는 기초학습능력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지구력 떨어지고, 집중력 떨어지고, 매사에 하기 싫어하는 마음까지 있는 아이들이 무슨 학습이 잘 되겠는가. 학원을 가나, 과외를 받나 매번 그 점수가 그 점수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반적으로 상태가 좋지 않은 아이들을 만난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도 있고, 엄청 산만한 아이들도 있다. 결손가정도 몇 명이나 있고, 성품이 굉장히 안 좋은 아이도 있으며, 자해를 하던 아이도 있다. 아이들의 상태를 평가한다고 오해하지 말라. 우린 단지 진단할 뿐이고, 그에게 맞춤으로 대안을 제시할 뿐이다. 뭐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진단은 필수이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도, 시간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가진단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객관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부담 없이 우리에게 과감한 진단을 맡기신다. 그래서 부모님들도 아이들의 새롭고 이상한(?) 모습을 실제로 지켜보게 된다.


  지금은 그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먹고 잔다. 사람의 습관이라는 것이 한두 번 만나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같이 살면서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아이들의 습관들을 보게 된다. 절대로 그것에 대해 바로 지적하지는 않는다. 그 팀이 공동으로 책임을 질 것이다. 역사시간에 배웠던 연좌제 혹은 인징의 개념과 비슷하다. 잘못은 본인이 했으나 책임은 모두가 같이 진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줄 아는가? '옆구리 찔러 절 받는다'는 속담같이 된다. 나는 그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도 않았고, 그 아이는 감정도 상하지 않았다. 참 좋은 방법이다. 



  1. 요새 아이들과 바르게 앉아 있는 자세 가지고 싸운다. 스마트폰과 같이 태어난 아이들이기 때문에 항상 등이 굽어져 있다. 목도 반듯하지 않고 다리도 떠는 아이들이 많다. 근육이 굳어져 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바른 자세가 잘 될 리가 없다. 꾸준한 스트레칭과 계속 관찰하면서 짚어줘야만 아이들의 자세는 좋아진다. 이미 오래 벤 습관은 엄청난 정신력이 없으면 유지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제 이 아이들은 어느 정도 훈련이 됐는지 상당히 오랫동안 자세를 유지한 채 자신의 할 일들을 한다. 얼마 전 오랜만에 는 아이들을 보는 부모들의 반응을 짧게 소개한다.


  "아니, 자세가 왜 이렇게 좋아졌어요? 진작에 보낼걸 그랬네."


  2. 또 연필 잡는 자세 가지고 싸운다. 연필에 왜 이렇게 집착하냐고 묻는 분들이 더러 계신데, 여전히 학습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쓰기이다. 쓰기는 곧 암기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 글자도 쓰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잘 쓸 리가 없다. 써본 경험도 별로 없다. 당연히 연필 잡는 자세도 이상하다. 아주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을 무시하면 안 된다. 연필 잡는 자세 하나만으로도 글씨 쓰기의 속도와 양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젓가락질 연습하면서 낑낑대는 아이들을 보면 간혹 웃음도 나곤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기초적인 것 없이 심화과정을 밟는 것은 결국 한 방에 무너지는 법이다. 그리고 바른 글씨를 강조하는 이유도 성품에 있다. 한 번에 글씨를 휙휙 쓰는 아이들은 자신을 잘 통제하지 못하는 아이이다. 감정적인 아이라고 말하겠다. 감정적인 아이들은 뭐든지 한 번에 한다. 동작도 크고 빠르다. 고딕체를 유지해야 하는 글씨가 이상한 필기체로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감정적인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천히 글씨를 바르게 쓰라고 하는 것은 아이들의 생각 뒤 행동을 조절해 주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


  3. 그다음으로 초등학교 수학 가지고 싸우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이 초등학교 계산 문제를 틀릴 수 있을까? 당연히 틀린다. 아이들이 '실수'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문제를 풀어내는 스타일이다. 더하기 빼기를 모를 리가 없는 아이들이 문제를 틀린 이유는 몰라서가 아니라 항상 꼼꼼하게 문제를 읽거나 대충 보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문제를 빠르게 풀면서 고쳐야 하는데, 시간 상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할 수 없으니 초등학교 1-6학년 문제들을 가지고 한다. 점차 단계들이 높아지긴 한다. 단, 그 학년에 맞는 것을 다 맞아야 올라간다. 벌써 1바퀴는 다 돌았다. 다시 처음부터 해 보면 예전보단 실수가 덜 나오겠지.



  결국 우리가 하는 일은 아이들의 성품을 교정해 주는 일이다. 교정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변화가 무조건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습관이 지속될 수 없다. 우리는 그 싸움을 매일 수 십 명의 아이들과 하고 있다. 기초가 하나도 안 되어 있는 아이들과 전쟁하면서 산다는 게 참 쉽지 않다. 그래도 좁아터진 기숙사에서 25명이 넘는 아이들과 살면서 느끼는 게 참 많다. 성경에 보면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광야생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잘은 모르지만,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노예 살이를 하다가 탈출했다. 그들을 이끌어 낸 것이 모세라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겠지만) 노예근성이 짙게 벤 그들이 모세에게 얼마나 많은 불평불만이 있었을까? (실제로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다)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노예근성이란 밥 빌어 먹는 기술만이 아니라 하던 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들의 집합이다. 잘못된 습관부터 잘못된 생각, 그리고 이기적인 마음까지 그것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수조건이었던 그들에게 광야에서의 삶은 지옥과도 같았을 것이다. 우리도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각자의 삶에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온 아이들이 모여 사는 게 꼭 광야에 모아놓은 이스라엘 백성들 같았다. 


  하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여기 모인 아이들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오늘도 힘을 내어 저들과 함께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성격과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엄청나게 무한한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들과 함께 산다는 건, 미래를 봤을 때 참 즐거운 일이 된다. 오늘의 전쟁이 훗날 좋은 결과로 이어만 진다면, 우리가 고생해 온 모든 길들은 그렇게 보상을 받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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