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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뉴 Apr 12. 2019

찌그러지면 어떻고, 틈이 생기면 어때?

고생한 나에게 던지는 위로

오랜만에 쓰는 글이다. 나는 그동안 백수의 삶을 즐겼다.





제주도에서는 유채꽃과 벚꽃이 한창일 때, 나의 고향은 아직 꽃이 피기 전이었다. 나는 그 무렵에 일을 그만두었다. 약 4년 동안이나 열심히 했던 일을 그만두었다. 친구들이나 가족들, 그리고 같이 일했던 선생님은 왜 그렇게 갑작스러운 결정을 했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따지고 보면 갑작스러운 결정은 아니었다. 작년부터 이어져 온 나의 고민은 제주에 와서 대안학교를 시작하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긴말은 접어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실패했고, 완성되지 못한 채로 도망친 꼴이 되었다.


인생을 완벽한 원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내 나이 무렵, 어느 정도 원의 모양이 형성돼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모양 그대로 더 크게 그려지거나 경계선이 더 진해져야 한다. 하지만, 나는 원모양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여기저기 찌그러져서 마치 큰 톱니바퀴의 이처럼 생겼다. A라는 것을 잘하고 싶은데, B가 찌그러져서 못하고, B라는 것을 잘하고 싶은데, C가 찌그러져서 못한다. 쉽게 말해서 해야 할 일들도 있고, 하고 싶었던 일들도 있었으나, 뭔가 계속 부족해서 잘 해내지 못했다는 말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지금 뭘 딱히 할 수 있는 기술도 없다. 돈을 모으기는커녕, 카드빚만 진 채 나왔다. 어쩌면, ‘선생님’ 혹은 ‘코치’라고 불리었던 나의 과거들이 감사할 뿐이었다는 사실에 낙심도 된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나는 백수가 된 나의 삶을 리셋하길 원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백수의 삶이 좋은 건 있다. 매일 몇 개씩 먹었던 두통약을 먹지 않아도 되는 것, 그리고 그동안 했던 경험들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 일 때문에 접어두었던 하고 싶은 일들을 써보고 생각하는 것, 늦게 일어나고 혹은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것, 따뜻한 이불 밑에서 몇 시간 있을 수 있는 것, 매일 사진 찍고 드론을 날릴 수 있는 것 등등 일했을 때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아이들과 24시간 붙어있노라면 사실 저런 일을 하기는 쉽지 않다. 늘 관찰하고 기록하고 분석하고 수치화하여 보고를 하는 게 나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자만심을 곁들이자면, 나는 나와 비슷한 계통에 있는 사람들보다 특수한 경험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백수가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래서 조금은 불안했다. 일을 하다가 그만두니까 뭔가를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심장이 계속 쿵쾅쿵쾅 뛰었다.




그러던 중에 ‘스페인 하숙’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어느 편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떤 덴마크 순례자의 말이 내게 큰 힘이 되었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어.

나는 백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또는 백수가 된 그 자체에서 뭔가를 배우려고 했었다. 그렇게 계속에서 생성되는 불안감이 한편으로 쉬기를 원하는 나의 마음을 자꾸 몰아내었다. 하지만 한 순례자의 저 말이 내 생각을 지워버렸다. 사람이 참 그렇다.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되면 엄청 기분이 좋아진다. 극단적인 설명이지만, 난 나의 설명이 맞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에 대해서 항상 배우기를 기대하는 것은 좋은 자세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더 그르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마음이 내켰던 대로, 내가 제주에서 뛰쳐나왔던 대로 놔두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더니 귀신같이 불안감은 사라졌고, 오히려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백수가 된 지 열흘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나는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조금 찌그러졌으면 어떻고, 틈이 많으면 어때? 어차피 인생은 채워가는 것 아니겠어?’


나의 인생은 그랬다. 그렇다고 앞으로의 내 삶의 모양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확신이 하나 생겼다. 그 틈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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