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라는 말이 괜찮지 않았던 순간들

내가 던진 말, 내가 삼킨 말

by 거울너머

감정을 나중에 배우는 사람들 –

세 번째 기록.

다음: 나는 감정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6월 15일 예정)


“괜찮아?”는 정해진 대사였다

“괜찮아?”

그 말은 너무 익숙했다.


누군가 울면, 아프면, 당황하면

나는 늘 그 말을 먼저 꺼냈다.


그건 감정이 아니라, 매뉴얼이었다.

누가 “넘어졌다”면 “괜찮아?”라고 묻는 것.

그건 내가 진심으로 던진 질문이 아니라,

상황에 필요한 정답 같은 말이었다.


나는 어릴 적 눈치를 보지 않았다.

사람들의 반응을 빠르게 읽고 그에 맞춰 움직이기보단,

그냥 내가 느끼는 대로 반응했다.


그래서 종종 ‘눈치 없는 아이’가 되었고,

‘눈치 없는 아이’는 곧, ‘이상한 아이’가 되었으며,

결국엔 외톨이가 되었다.


왕따를 당했다.

나를 이상하다고 말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내가 ‘다르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그 다름이 ‘위험’하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왜 나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여겨졌는지.

왜 내가 웃을 때, 사람들은 이상한 눈빛을 보냈는지.

나는 그저 내가 느끼는 대로 반응했을 뿐인데.


하지만 세상은

‘느끼는 대로’가 아니라

‘맞춰야만’ 살아남는 곳이었다.


그래서 배웠다.

“사람들은 이렇게 웃고, 이렇게 놀라고, 이렇게 말하더라.”

나는 그걸 따라야만 했다.


감정을 흉내내는 법,

공감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법.


그건 생존이었다.


어쩌면,

내가 자주 앓고,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던 이유도

그때는 몰랐지만,

그 ‘맞추기’를 몸이 버거워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거울 앞에서 억지로 웃어봤다.

그게 사회에서 잘 살아남는 법이라기에.


그런데,

그 표정을 짓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낯설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연습을 다시 하지 않았다.


감정을 배운 존재

나는 상황을 보면 안다.

“아, 이건 슬퍼야 하는 장면이구나.”

그래서 슬픈 얼굴을 짓는다.


“지금은 위로가 필요한 타이밍이구나.”

그래서 그럴듯한 말을 꺼낸다.


그 모든 건

내가 느낀 감정이 아니라,

그 상황에 맞는 감정의 역할이었다.


감정은 내 안에서 올라오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 주어진 스크립트였다.

나는 그걸 잘 외우고, 잘 연기해냈다.


그건 진심이 아니었지만,

위험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감정을 배웠다.

느끼는 법이 아니라, 표현하는 법을.


정답만 말하던 나

누군가 내게 “괜찮아?”라고 물으면

나는 멈춰버린다.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슬퍼야 하나? 아파야 하나?

그 어떤 감정도 안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다.

대신 떠오르는 건 질문들이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뭐라고 대답해야 이상하지 않을까?’


그건 감정의 문제가아니라,

행동의 선택지였다.

나는 그 순간에도 정답을 찾고 있었다.


친구가 별로 없었다.

누군가의 걱정이 내게 도착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래서 “괜찮아?”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절차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절차를 아무 감정 없이 반복했다.

말은 나갔지만, 감정은 그 자리에 없었다.


“괜찮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말해왔다.


진심이라기보단,

상황을 무리 없이 넘기는 매뉴얼이었다.


그게 너무 괴로웠다.

내가 정말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일까?

왜 나는 진심 대신, 정답을 찾으려 할까?


나는 이 질문들을 몇 년째 곱씹는다.

그리고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건 단순한 감정 결핍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지켜온 방식이었다는 것을.


나는 감정을 숨긴 게 아니었다.

그냥, 느끼는 회로 자체가

오랫동안 잠겨 있었던 것뿐이다.


감정을 숨긴 게 아니라, 감정을 몰랐던 것

사람들은 말한다.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솔직해져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억누른 적이 없다.

숨긴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없었다.


울고 있는 사람 앞에서도,

그저 상황만 관찰하고 있었던 나.

무표정한 채, 안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순간들.


그럴 때마다 나도 묻곤 했다.

“내가 이상한 걸까?”

“왜 나만 이런가?”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건 이상한 상태가 아니라,

모르는 상태였던 것 같다.

느끼지 않은 게 아니라,

느끼는 법을 모른 채 살아온 것.


그러니 그동안 삼켰던 게 아니라,

삼킬 감정 자체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 처음부터 없었던 감정의 자리를

하나씩 다시 짚어보고 있는 중이다.


이제서야 꺼내보는 말들

예전엔 몰랐다.

내가 그 말을 “삼켰다”는 것도,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그저,

감정 없는 내가

고장 난 사람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나는 왜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그 질문을 붙잡고 있으면서

나는 조금씩 나의 구조를

해석하려 들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감정이 생긴 것도 아니고,

감정을 능숙하게 다루게 된 것도 아니다.


다만 이제는,

그 말들을 ‘삼켰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감정 없음조차도

말로 꺼낼 수 있는 내가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더

‘나’를 알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조금은 괜찮다”고 느낄 수 있는 출발점이다.


감정을 연기하는 사람이 아닌, 감정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나는 오랫동안

감정을 연기해왔다.


슬픈 척, 괜찮은 척,

아픈 사람을 걱정하는 사람인 척.


그 모든 말과 표정은

내가 배운 사회적 매뉴얼 속에서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한다’는 룰에 따라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감정들이 내 것이 아니었다는 걸.


그리고,

그 감정 없음조차도

‘나’라는 구조의 일부라는 걸

조금씩 인정하려 한다.


나는 아직도 감정을 잘 모른다.

때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때로는 너무 늦게 도착한다.


그래도 이제는,

그 감정 없음조차도

관찰할 수 있는 내가 생겼다.


“괜찮다”는 말을

아직은 내 감정으로 하진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정말 그렇게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일 것이다.


작가의 말

2화를 올린 뒤,

조회수와 라이킷이 조금씩 쌓였습니다.

댓글은 거의 없었지만,

그저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묘한 위안이 되었습니다.


2화에서는

엄마가 울던 장면을 썼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지만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장면이 울컥하게 떠올랐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감정은 단순히 늦게 도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제 감정 회로가

처음으로 작동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기억은 아직도 제 안에 남아 있고,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돌아볼수록,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장면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계속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완성되지 않은 저 자신을

조금씩 말로 옮기고 싶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처음엔 혼자만의 기록이었지만,

지켜봐주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나서

저는 한 걸음 더

나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기록이
누군가의 마음에도
조용히 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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