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속도는 같지 않다

나는 생일이 늘 낯설었다

by 거울너머

축하받는 자리에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생일이 늘 낯설었다.

기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감정은 이상하게도, 늘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케이크 위로 촛불이 흔들리고,

엄마가 “생일 축하해”라고 말했다.

가족들이 하나둘 따라 불렀지만

그 말투는 진심이라기보다

그냥 해야 하니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그 순간, 너무 두려웠다.

기쁘지 않은 나를

누군가 눈치채진 않을까 봐.

지금은 웃어야 할 시간인데—

그게 잘 안 되는 나를 들켜버릴까 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 여러 개의 화면이 동시에 켜진 것처럼

생각들이 겹겹이 겹쳐졌다.


그건 단순히 어색함이 아니라

기능처럼 작동하는 ‘위기 대응’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기쁨이라는 감정을

내 안에서 꺼내지 못했다.


그 짧은 몇 초가

너무 길고 버거워

나는 그냥 “네”라고만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했으니까.


웃어야 하는 타이밍에 감정은 없었다

그 자리에선, 그냥 웃고만 있어도 되는 거였다.

그런데 나는 그게 어려웠다.


내 생일인데, 왜 나는 이 자리에 있는 게

이토록 낯설고 어색했을까.


억지로라도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조차 잘되지 않았다.

웃는 얼굴을 흉내 내는 일마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왜 이렇게 굳어 있어?"

“기분 안 좋아?”


아무도 말하진 않았지만,

그 말이 꼭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말들을 막기 위해

더 애써 웃어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마음은 더 멀어졌다.


나는 기쁘지 않은 걸 감추려 했고,

그때 처음 알았다.

웃지 않으면, 이상해지는 구조가 있다는 걸.


존재를 줄이는 법

술자리도 비슷했다.

다들 웃고 떠들며 신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나는 그 분위기에 맞는 행동들을

전략적으로 흉내냈다.


적당한 타이밍에 짧게 웃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채웠다.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 이상을 하려면—

내 안에 뭔가 ‘감정’이라는 것이 있어야 했는데,

그 순간 나는, 비어 있었다.


문제는—

가만히 있기엔, 너무 눈에 띄는 자리라는 것이었다.

폰을 볼 수도 없고, 딴청을 부릴 수도 없는

그 조심스러운 공기 속에서

멀뚱히 있는 나는,

언제든 ‘무례한 사람’이나

‘기분 나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게 너무 싫었다.

나는 단지 감정이 없었을 뿐인데—

그걸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방법을 찾았다.

입에 뭔가를 넣고, 천천히 씹는 것.


말없이 씹고 삼키는 그 몇 초들이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건—

그 시간도 곧 끝난다는 사실이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더는 숨을 수 없었다.

그다음은 온전히

감정을 연기해야 하는 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버티고 있는 나’를 지키는 방어선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밥을 씹었다.


그건 버티고 있는 나를 지키는, 작고 조용한 저항이었다.


나는 웃음을 연구했다

웃는 것도 실패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억지로 웃다가, 입술이 떨렸다.

그걸 본 상사는 말했다.

“기분 안 좋은 거예요?”


나는 웃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웃으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나를 감추는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의심을 부르는 신호가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웃음이라는 행동 자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내가 짓는 웃음은 왜 그렇게 어색할까.

왜 사람들은 나를 보고,

“기분이 나쁜 거냐”고 묻는 걸까.


나는 혼자 방 안에서 연습했다.

입꼬리를 올려보기도 하고,

소리 없는 웃음을 흉내내기도 했다.

“하하.” “흐흐.” “허헛...”


하지만 입 밖으로 낸 소리는

어색한 성대모사처럼 들렸다.

익숙한 내 목소리가 아닌,

가면을 쓴 누군가의 소리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작게 혼잣말을 내뱉고 연습을 멈췄다.


하지만 곧 다시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 “기분 좋아 보여”라고

오해해줄 만한 적당한 웃음을 찾아내야 했으니까.


그래서 만들어낸 건—

이가 살짝 보이고, 입꼬리만 올리는

인위적이지만 효과적인 웃음.

그건 진심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데엔 충분했다.

그게, 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웃음이었다.


그래도, 나를 이해하려는 마음

아직도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자리에 서면,

마음보다 설명이 먼저 떠오른다.

느낌보다 매뉴얼이 먼저 움직인다.


예전엔,

그게 고장 같았다.

감정이 끊긴 사람처럼 느껴졌고,

왜 나만 이럴까,

왜 나는 안 되지,

그런 자책으로 끝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다.

‘기뻐야 한다’는 말 앞에서,
그 감정을 흉내 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조금은 나 자신에게 말해주게 되었다.


웃지 못해도 괜찮다고.

그 순간이 진짜 기쁜지 아닌지는,

나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나는 여전히

표정보다 구조가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고,

감정보다 상황의 맥락을 먼저 읽는 사람이다.

마음의 속도는, 같지 않다.

늘 늦게 도착하곤 한다.

하지만 그 느린 마음으로도, 나는 나를 따라잡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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