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가 다른 우주를 열 때, <다른 우주의 문법>

by Kimlab Type


9월의 어느 날,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김영사라는 출판사에서 새로운 책을 출간하는데, 바이럴 마케팅에 필요한 작업물을 맡아줄 수 있겠냐는 메일이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꽤 책을 사랑하는 편입니다. 말이 많다 보니 이야기하는 것도,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이야기로 가득한 독서’가 제 취미가 되었죠.


그런데, 출판사에서 전달해 준 책 표지와 원고 파일을 보며 오래 고심했습니다. 제가 책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한 번도 이런 방식의 작업은 해본 적이 없어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거든요. 하지만 시도 조차 해보지 않고 회피만 하다보면 두려움만 커지잖아요? 결국 용기를 내어 의뢰를 수락했고, 감사하게도 출판사에서 많은 도움을 주신 덕분에 즐겁게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 부터는 작업 과정과 책을 읽으며 느낀 제 생각들이 담겨 있습니다. 재미있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른 우주의 문법 - 그 우주에는 인어와 화성인과 주머니 고양이가 산다>


책을 간단히 살펴볼까요? 소개글 서두에는 이 책을 '언어가 창조하는 광대한 우주를 탐험하는 아홉 편의 오디세이아'라고 설명하고 있어요. 그러나, 너무 광대했던 탓일까요? 아니면 제 학식이 짧아서일까요? 저는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솔직히 말해 계속해서 물음표가 떠올랐습니다. 이해가 잘 가지 않았어요. 흐릿한 문장을 계속 읽고 또 읽고, 밑줄까지 그어가며 이 책을 또렷하게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책의 절반을 넘길 즈음, 서서히 선명해지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 책은 언어로 하나의 우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언어'라는 것이 어디까지 팽창할 수 있을지 보여주는 책이었습니다. 책의 자세한 내용을 스포할 순 없으니 제가 감명 깊게 본 부분, 부분을 얘기하면서 그 순간을 어떻게 작업에 녹여냈는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초기 스케치입니다. 제가 책을 읽으며 메모했던 단어들은 '삼각형의 환상, 인어, 비늘, 음파, 수중언어, 돌고래, 몬더그린, 작살과 인어비늘, 자신의 꼬리를 먹는 뱀'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다른 우주의 문법> 중 '4장. 바람의 음운론의 이야기'를 최대한 글자에 담으려고 했습니다. 조금 더 얘기를 해보자면, 해당 챕터에서는 제주도 귀덕포구를 배경으로 제주 앞바다에서 자생하고 있는 인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인어의 의사소통'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인어들의 언어를 실제로 습득해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어를 동등한 위치로 표현하기보다는 '가축'이라 표현하며, 그들의 언어를 익히고 소통하는 행위를 '연구'로 규정합니다.


연구는 이렇게 진행됩니다. 바지선에서 10~15마리의 인어가 갇혀 있는 대형 철제 케이지를 수중에 내립니다. 그리고 갇힌 인어들에게 연구진들은 인어의 언어로 '콜링'을 유도합니다. 인어들의 콜링이 시작되면 그 소리를 들은 다른 인어들이 케이지 주변으로 몰려듭니다. 그때 대형 그물로 새 인어들을 포획합니다.


즉 '콜링'은 연구를 위한 도구이죠. 인어들에게 콜링을 강요해 더 많은 연구 대상을 모으고, 새롭게 포획된 인어들은 '가축'처럼 길들여집니다. 그 과정 속에서 말을 듣지 않으면(콜링을 하지 않으면) 연구진들은 인어를 향해 작살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 작살에 박혀 피를 흘리는 인어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인어들은 그제야 콜링을 시작하죠.


현실 속에서도 ‘연구’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잔혹함이 자행되기도 하죠.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픽션이지만, 완전히 허구라고는 할 수 없죠. 새로운 언어, 미지의 언어를 사람들은 언제나 형상을 연구하고 분류하고 규정지으려 하니까요. 가끔은 그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잔혹함을 '연구'라는 목적으로 타당하게 만들려고 하니깐요.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언어, 미지의 언어를 알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잔인함은 묵도되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학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완성된 최종 작업물입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고대 쐐기 문자나 갑골 문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를 생각하고 그와 비슷한 레퍼런스를 많이 수집했습니다. 작업을 진행할 때는 인어들의 비명이 상처를 남기는 과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비명(음파)이 어딘가에 부딪혀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가 형체가 되어 기록으로 남는 과정이 마치 고대인들이 문자를 점토판이나 거북이 등껍질에 새기던 행위와 유사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가장 즐겁게 작업했던 글자를 하나 뽑자면 '주'인 것 같습니다. '주'에서 'ㅈ'을 보면 콘크리트 벽이 부서지는 듯한 효과와 함께 그 사이에 작살이 꽂혀있습니다. 작살이 꽂혀 액체가 아래로 흐르며 'ㅡ'을 넘어 'ㅜ'를 물들입니다. 흘러내리는 액체는 눈물로 보이기도 하고, 피로도 해석할 수 있죠.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들도 있습니다. '우'나 '문'에서는 우리가 보통의 인어를 상상하면 볼 수 있는 비늘을 담아냈고, '법'이나 '우'에서는 물갈퀴, 꼬리, 음파 등의 요소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변 분들에게 '제가 이런 디테일을 넣어봤어요!'라고 하기 전까지는 잘 눈치채지 못하시더라고요. 나름 직관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한편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내서 눈에 확 튀지 않는 거라 믿습니다. (하하)




최종 작업물에서 포인트 컬러까지 추가해 보았습니다. 책 표지에 사용된 마젠타 색상을 차용해 그림자 부분에 넣어보았는데, 제가 의도했던 '작살에 꽂혀 피를 흘리는 인어'의 이미지를 직·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 만족스러웠습니다.


저는 글자 작업 의뢰가 들어오면 늘 가슴이 뜁니다. 글자 작업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의뢰해 주신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하나씩 추리해 가며 글자로 표현하는 과정이 저에게는 정말 스릴 넘치는 일이거든요. 그래서인지 클라이언트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잠시 시무룩해지기도 하지만, 바로 다음 시안에서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정확히 맞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더 열정적으로 몰입합니다. 아마 이런 과정을 온전히 즐기기 때문인지, 몇 년째 이 분야에 있어도 제 마음은 여전히 글자를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설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작업 또한 그 설렘을 그대로 안고 즐겁게 진행했습니다. 360쪽이 넘는 글을 읽으며, 어떻게 하면 이 책의 세계를 글자 속에 온전히 옮겨 담을 수 있을지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여러분께 제 흔적과 노력이 조금이나마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관련한 저의 서평은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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