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뭐라고하고 헤어졌어?"
"뭐 그냥. '오늘 재밌었어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라고 했던 거 같은데."
지현이 소개팅 후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마음에 들었다길래 맛있는 거 먹으면서 오래도록 같이 있었는 줄 알았더니, 그냥 커피 마시면서 얘기하다가 헤어졌다는 거다.
몇 년 전 내가 소개팅 하던 시절에는 만나서 파스타를 먹고 차를 마시러 간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상호 성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소위 소개팅 명소라는 곳은 어스름한 조명 아래 2인 테이블이 가득했고, 파스타를 먹기에 적합한 포크가 예쁘게 세팅되어 있었다. 이런 암묵적인 규칙이 깨진 소개팅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물어보니 그게 요즘 소개팅 트렌드란다.
"야, 요즘은 그렇게들 많이 해. 그리고 나 밥은 좀 맛있게 먹고 싶어. 소개팅에서는 도저히 맛있게 먹을 수가 없더라고."
맞는 말이다. 결혼 전 기억을 떠올려보면, 소개팅을 할 때 항상 맛집이라는 곳을 갔지만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전혀 없다. 메뉴를 고를 때부터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걸 먹어야 입에 안 묻을까, 냄새가 나지 않을까를 고려해서 음식을 골랐다. 고심해서 고른 음식을 먹을 때는 상대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손으로는 파스타 면을 말아도 되는 지 고민했다. 언제 고개를 숙여 말아 놓은 면을 입에 넣을 지 타이밍을 살폈다. 눈치게임 끝에 겨우 파스타를 입에 넣었는데, 말 순서가 나에게 넘어왔을 때는 얼른 이 탄수화물을 입에서 위로 넘겨버리고 대답을 해야한다는 압박감에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삼켰다. 이러니 맛있게 먹었을리 없다. 그래서인지 소개팅을 하고 온 날이면 늘 허기가 졌고, 집에 와서 밥을 다시 먹었다. 식은 밥에 열무김치와 고추장 넣고 비빈 후에 참기름 휙 둘러 먹었는데, 그건 또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회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블링이 매혹적인 소고기가 눈 앞에서 노릇노릇 익고 있어도 부서 막내였던 나는 '고기 맛있겠다' 라는 사치스러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겉바속촉의 미듐으로 굽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회식 비용이 부서 예산을 초과하지 않도록 매의 눈으로 모든 테이블 상황을 살피며, 부서원들이 섭섭치 않게 소고기를 먹었다는 판단이 들면 "사장님! 소고기 그만 주시고, 이제 돼지로만 주세요!"를 외쳐야 했다. 본래 식사(食事)라는 뜻은 '음식을 먹는 일'이지만, 회식에서의 식사는 '음식을 먹으며 하는 일'에 가까웠다.
본질적으로 맛있는 음식이 소개팅과 회식에서 맛있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다. '목적의 음식(Food as a purpose)'이 아니라 '수단의 음식(Food as a mean)'이었기 때문이다.
소개팅의 목적은 남녀가 연인이 될 지 서로 알아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그 필연적인 어색함을 이겨 내고 목적 달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수단이 바로 음식이다. 다시 말해,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손을 어디다 둬야할지도 고민될텐데, 어색한 손 파스타 면이라도 말면서 열심히 얘기해 보시라고 도와주는 차원에서 존재하는 '수단의 음식'에 가깝다. 맛있게 먹는 것이 목적인 '목적의 음식'이 아니다.
회식의 목적은 부서원 간 친목 도모 및 단합이다. 친목도모를 위해 다짜고짜 같이 모여 있으라고 할 수 없으니 슬쩍 고기를 껴 놓는다. 다짜고짜 같이 모여 있는 것은 이상해도 같이 모여 고기를 먹고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식은 그렇게 모인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부서원들이 같은 방향(노릇노릇 익어가는 고기)을 바라보는 단합까지 만들어준다.
음식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일 때 맛있다. 소개팅의 파스타는 수단이었지만 집에서 먹은 열무비빔밥은 목적이었다. 열무비빔밥을 먹을 때에 맛있게 먹겠다는 목적 외에 다른 상위 목적은 없었다. 그래서 파스타는 셰프의 작품이었지만 맛있지 않았고, 열무비빔밥은 참기름 넣어 휘뚜루마뚜루 1분만에 만든 것이었지만 지금도 침이 고일만큼 맛있었다.
만약 나에게 마지막 식사만이 주어졌다면, 그리고 이 세상에는 소개팅 파스타, 회식 소고기, 휘뚜루마뚜루 열무비빔밥 세가지만 남았다면, 나는 화려한 수단의 음식보다는 소박한 목적의 음식을 선택해 열무비빔밥을 맛있게 먹을 것이다.
"배고프다. 라면 먹고 갈래?"
소개팅 이야기를 끝낸 지현이가 물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이영애 분)는 집에 데려다 준 상우(유지태 분)에게 "라면 먹을래요?"라고 묻는다. (많은 사람들이 라면 먹고 갈래로 기억하지만, 실제로는 라면 먹을래요 라고 말한다.) 은수에게 라면은 상우를 꼬시기 위한 수단의 음식이었다. 영화에서는 은수가 라면을 뜯다 말고 화면이 전환되어, 실제 은수와 상우가 라면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먹었다면 수단의 음식인 라면이 맛있었을리 없다.
지현이에게 라면은 나를 꼬시기 위한 수단의 음식이 아니고 그저 맛있게 먹고 싶은 목적의 음식이다. 지현이가 진라면 매운맛을 뜯고 물을 끓이고 있다. 목적의 음식 진라면 매운맛. 저건 맛있을 수밖에 없다.
"응 먹고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