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생 일기] #01. 썰레놓은 마음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프리퀄

by 연이
썰레놓다: 안 될 일이라도 되도록 마련하다.
-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IMF는 끝나지 않고 2005년도에도 계속 진행 중이었다. 1997년에 시작해 2001년에 끝난 IMF은 이미 끝난 지도 4년이 지났는데, 일자리는 정규직보다 기간제, 파트타임이 더 많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컴퓨터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알바천국에는 엄청난 수의 일자리들이 넘쳐났다. 세상은 변해 있었다.


연이 역시 대학을 졸업하고 정규직을 위해 100군데의 이력서를 넣었지만, 단 한 군데의 서류면접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지방대의 설움인지 몰라도 그때는 정말 암담했다. 차라리 연이는 이렇게 된 이상 시대의 흐름에 맞춰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넘쳐나는 알바를 통해 정규직만큼 아니더라도 정규직보다 더 많은 돈을 벌면 되지 않을까 했다. 실제로 알바를 하면서 그렇게 정규직이 아닌 알바만 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이 실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가진 유용한 능력들이 참 아까울 정도였다.


작가의 꿈이 있었던 대학교의 연이는 IMF로 출판시장이 얼어버리자 꿈은 꿈으로 남겨두고 생계를 걱정하는 여느 일반인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두 번째 관심을 보인 것이 컴퓨터였다. 처음 산 컴퓨터가 조립컴퓨터였고 틈만 나면 궁금해서 열어보고 안에 있는 메인보드, CPU, 그래픽카드, 파워서플라이, 램, HDD 등을 그 위치까지 상세하게 그려놓으며 컴퓨터에 진심을 보였다. 그런 열정은 컴퓨터 자격증에도 관심이 확장되어 워드프로세서, 민간자격증이었던 정보검색사 2급, 1급, 웹페이지 메이커 등 여러 개 취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알게 된 컴퓨터의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관련 지식으로 컴퓨터 설치 알바를 시작했다.




기업체 및 관공서의 컴퓨터 설치를 하는 업체의 알바 구인 광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다. 정규직에서는 면접의 기회조차 받지 못한 연이는 알바 자리는 참 쉽게 되었다. 그렇게 설치를 하게 된 곳들 중 기억에 남는 두 곳이 있었다. 한 곳은 국회사무처와 다른 하나는 모 대기업이었다.


국회사무처의 국회의원 사무실에 노후화된 컴퓨터의 교체가 있었고 그곳에서 컴퓨터 설치를 하면서 국회직 공무원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의 나이가 연이와 비슷하거나 조금 어렸다. 낯선 환경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알게 모르게 괴리감을 느껴졌다. 그들이 여기에 들어올 때 연이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밀려왔을 때, 가장 직급이 낮은 공무원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곳에 들어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공무원은 스스럼없이 연이를 대하며 안 그래도 국회를 나가는 정문 앞에 국회직 공고가 붙어 있다고 했다. 그러며 웃어주는 그 공무원 덕에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한 공무원에 대한 연이의 이미지를 한방에 날려줬다. 점심을 먹고 3일째 이어진 컴퓨터 설치는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내일은 모 대기업 로비로 모이라고 설치 팀장의 말을 듣고 뿔뿔이 자신의 집으로 헤어졌다. 컴퓨터 설치 알바가 재미있으려고 할 찰나였다. 오늘은 또 어떤 곳을 구경하게 될까 궁금해하며 모 대기업으로 갔다. 연이가 서류조차 낼 수 없었던 이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근무할까 궁금했다. 국회사무처도 출입에 까다로운 검문이 있고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들어가야 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모 대기업 역시 보안에 철저했는지 각 층마다 목에 달고 있는 사원증을 찍고 들어가야만 하는 곳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컴퓨터 설치는 커다란 홀처럼 생긴 사무실의 반 정도도 못하고 오전 업무를 마무리 하려고 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배가 고팠다. 컴퓨터 설치 알바가 좋았던 이유는 점심을 제공해주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은 김치찌개 백반, 어떤 날은 돌솥비빔밥, 가끔 푸짐하게 돼지불고기가 있는 곳으로 잡아주기도 했다. 연이와 한 팀을 이루며 꽤 오래 같이 일했던 동생이 이만하고 점심 먹으러 가자며 장갑으로 상의며 바지를 털며 다가왔다. 직원들이 빠져나가고 있는 사무실을 보며 다 빠져나가게 되면 문이 닫히니 서둘러 마지막 한 대를 마무리를 했다.


"이거 누가 건들었어? 야, 너희 둘."

한껏 짜증과 불만이 섞인 듯한 목소리는 연이와 같이 일하는 동생을 잡아끌었다. 처음에는 우리를 부르는지 몰라서 나가려고 하니 더 큰 소리로 연이와 동생을 불렀다. 일단 어떤 일인지 몰라 다가가니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설치하면서 하드디스크에 자기가 작업한 파일이 다 날아갔다는 얘기였다. 연이와 동생은 기가 찼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컴퓨터는 아직 설치 전이었고, 보안상 컴퓨터를 분해하기 위해서 열면 컴퓨터에 달린 신호음이 울리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절대 그쪽을 먼저 해줄 수 없는 구조였다. 그것도 앞으로 2시간 이후에 진행될 예정이었던 곳이었다. 그걸 그 사람에게 얘기를 했으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건들었고, 사과하라고 했다. 그냥 사과가 아니라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했다.


배가 고파 오늘은 뭐 먹을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난데없이 욕을 먹고 있는 상황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고 황당했다. 점심을 먹고 들어온 직원들의 눈이 하나 둘 이쪽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의기양양해진 그 사람은 더 큰 목소리를 내었고 연이와 동생은 버티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라고 전달을 했을 텐데 나오지 않자 팀장이 같이 일하던 동료를 보냈다. 연이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팀장에게 가는 것이 보였고 팀장이 이내 그 사람에게 다가왔다. 팀장은 그 사람에게 뭔가 얘기를 했다. 이제 해결이 되나 보다 했다. 하지만, 오히려 팀장은 우리를 비난하며 그 사람의 편에서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했다. 더 황당한 상황이 되자, 연이는 눈물만 나왔다.


'무엇을 잘못한 거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잘못을 한 게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이가 우리의 사과를 바라고 있었다. 팀장은 빨리 사과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는 식이었다. 동생이 갑자기 참다 참다 폭발했다. 그 사람과 팀장 둘에게 뭐라 뭐라 하며 대들고 있었다. 연이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갑자기 보안팀 직원 한 명이 오더니 여기 아르바이트생 두 명은 그쪽으로 가지도 않았다는 것이 판명이 났다. 그 사람과 팀장의 사과가 있을 차례였지만, 그 사람은 오히려 큰소리로 웃더니 자리를 모면했다. 멍하니 있던 연이를 끌고 동생은 나가자 했다. 밖으로 나온 팀장은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대수롭지 않은 듯 우리 둘에게 '가자'라고 했다.


동생은 연이에게 괜찮냐고 했지만, 연이는 괜찮지 않았다. 동생에게 점심을 먹으러 가라고 하고는 연이는 바로 집으로 향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당당하게 요구하는 그 사람과 그것이 억지라고 알게 되었는데도 무마하려는 팀장을 보며 연이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알바만 하고 지내는 것이 이처럼 서글플 수가 없었다. 30대에 접어든 연이는 '썰레놓은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