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생 일기] #02. 네까짓 게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프리퀄

by 연이
안쫑잡다
마음속에 품어 두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모 대기업에서 나온 연이는 전철을 탔다. 수치심, 모멸감, 억울함, 그 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100군데 넘는 곳에서 떨어져 받은 감정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한꺼번에 밀려왔다. 전철에 자리가 있었지만, 앉을 수 없었다. 지하에 있던 역들을 지나는 동안 창문의 까만 배경에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덜덜 떨고 있는 낯선 사람이 연이를 마주 보고 있었다. 사시나무 떨리던 몸과 감정의 폭풍이 휘몰아치며 즐겁고 기쁘게 컴퓨터 설치 알바를 하며 컴퓨터 관련 업무를 하겠다는 다짐이 그대로 형체도 없이 무너져 버렸다. 마음이 수만 갈래로 갈라지는 것을 겨우 붙잡아두고 있었다. 수백 톤의 물을 담고 있는 댐의 갈라진 틈을 막고 서 있는 것 같이 곧 무너질 마음을 견디고 있는 연이의 모습이 처량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릴까도 생각했다.


지하구간을 지나 밖으로 나온 전철은 어둠 속 깊은 곳의 어둠을 밖으로 내보내는 듯 햇살에 창문이 반짝였다. 뭔가 연이를 위해 말을 해주는 듯했다. 괜찮다고. 햇살을 보니 갈라졌던 어두운 마음속에서 보고 싶은 것이 생각이 났다. 그 길로 연이는 국회사무처로 향했다. 정문 앞에 붙어 있는 그 공고문을 보기 위해.


그렇게 그곳에 가서 공고문 앞에 선 연이는 정규직의 꿈을 실현시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연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공무원은 정말 '아니올시다'였다. 대학을 나오고 왜 그것을 하느냐 할 정도로 공무원에 대한 인지도는 정말 바닥에 가까웠다. 대학 때는 여러 교수님의 랩실에 들어오라고 할 정도로 연이의 대학 생활은 괜찮았다. 하지만, 대학 선배들이 취업하는 것을 보고는 실망했다. 페인트 회사에 들어가도 제약회사에 들어가도 잉크 제조 회사에 들어가도 결국 같은 직업군에 수렴했다. 영업사원. 연이는 쫄보다. 누구에게 그럴싸한 말로 무언가를 팔기에는 정말 잼병이었다. 자신이 잘하는 것도 실전에서는 어버버 하는 먹통이 되는데, 가장 자신 없어하는 마음에 없는 상대방을 설득하여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파는 행위는 연이에게는 어쩌면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결국 연이는 대학에서 전공한 과대로 가기를 포기했다. 그리고는 대학 생활 내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 당시 한국에서 최대 규모의 도서관을 보유하고 있던 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연이는 그곳이 대학교 이전에 그토록 읽고 싶었던 책들이 쌓여 있는 보물섬처럼 느껴졌다. 대학교 다니는 동안 5시간의 통학 시간 내내 책을 읽고 또 읽으면 보냈다. 그러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의 고민을 했다. 하지만 고민만 할 뿐이었다. 답이 없는 고민이었다.


대학 동기들이 영업사원으로 자리를 잡고 다른 길로 직장인이 되어 있는 동안 연이는 계속 알바만 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는 연이는 술안주의 마른오징어였다. 그래도 친하다고 생각한 대학 동기에게 늦은 나이지만 공무원이 되겠다고 하자 그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연이의 예상과 다른 그의 태도에 당황했지만, 인정해야 했다. 그들의 공무원에 대한 편견은 그 당시 연이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공무원을 하겠다고 하니 연이를 더 하찮게 봤다.


유일하게 만나던 대학 동기가 전화를 걸어왔다. 너무 반가워서 나갔다. 그 동기는 정수기 회사로 옮겨 이제는 지점장까지 하고 있었다. 술 한 잔 걸친 그가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고 나간 후 한참이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자 찾아 나섰는데, 누군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들으려고 한 게 아니었지만, 그는 누군가와 연이 얘기를 하고 있었다.


"연이, 걔가 퍽이나. 공무원 되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친하다고 아니 대학교 4년 내내 붙어 다니며 정말 찐 동기인 줄 알았던 그 동기 입에서 나온 말은 모 대기업의 그 사람과 닮아있었다. 술이 취한 그 동기를 뒤로 하고 연이는 바르르 떨리는 몸과 마음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취기가 도는 몸을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숨었다. 연이는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어쩌면 이 지경이 되었나 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에 잠겼다. 연이는 부평에 있는 부평문고로 향했다. 서점 유리문에 붙어 있던 빼곡히 적혀 있는 조그만 글씨를 보기 위해 연이는 바짝 붙었다.


연이는 되고 싶었다.

공무원.


그렇게 그날부터 공무원의 꿈이 안쫑잡은 공시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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