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이별, 그리고 또 다른 무대를 향해
임원에서 내려오기 편을 쓰는 게 시간이 제법 걸렸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소환하려다 보니 어느 한 장면에 머무르며 곱씹기도 하고, 그때를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회사 연말 조직 변경과 임원 승진 시점이 다가오면 증권가 지라시처럼 별별 승진 명단과 퇴임 명단이 사내 메신저를 통해 돌곤 한다.
그걸 돌려보는 직원들은 임원 승진 후보 면면을 분석해 보고, 조직 변경에 따른 미래 조직을 구상해 보고, 그에 따른 각자의 현실 변화도 시뮬레이션해보기도 한다.
그때만큼은 회사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기대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지라시의 소스는 인사라는 말도 있었다.
임원 인사 전 개개의 여론을 들어보려고 슬쩍 흘려보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고, 인사 촉새들의 기밀 누설로 밝혀지면서 나중엔 이 시점이 되면 인사 함구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임원 인사를 담당하는 인사 담당자들은 비밀 방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며 한동안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사실 지라시는 직원들의 바람이 들어가 있었다.
승진 후보자들이야 이미 드러난 사실이고, C level 승진 대상자 역시 뻔한 사실이었다.
일 년간의 업무 보고 과정을 지켜본 직원들도 각자가 승진 심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눈은 있었으니까.
거기에 정보원들은 본인들이 원하는 인사를 가끔 한 줄씩 넣어 지라시를 양산하기도 했던 듯하다.
나 역시 이런 지라시를 보면서 나 스스로 조직도를 구상해 보던 시절이 있었다.
변화무쌍한 내용을 보면서 조직 변경을 유추할 때마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인사와 경영진의 구상은 늘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역시 이분은 될 줄 알았어 사람들 보는 눈은 다 비슷하구나', ‘아, 이래서 이 사람을 승진시켜 이 지역으로 보내려는구나’, ‘이 사람이 그분과 각별하다더니, 그 힘이 여전히 있었네’ 등등.
그런데 지라시에서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한 건 퇴임 임원 명단이었다.
내가 아는 이름이 올라 있는데, 나는 그 임원과 오늘도 같이 일을 하고 있는 경우였다.
어느 누구도 그 임원에게 귀띔해주지 않았다.
내심 ‘지라시 정보인데 굳이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실은 그렇기 때문에 알려주면 어때’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특히 부서원들에게까지 다 돌았는데, 퇴임 임원이 오늘도 열심히 회의를 하다가 갑작스레 전화를 받고 회의실을 나가버리고 그대로 집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 임원의 책상 정리는 비서가 하고, 송별회는 며칠 뒤에 치러졌다.
그사이 부서원들은 임원의 마음이 진정되기를 바라며, 새로운 임원과 다시 합을 맞추곤 했다.
나도 부서원으로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어느덧 회사생활의 철이 들 무렵부터 나는 결심했다.
나의 친한 선배들이 퇴임 지라시 명단에 오른다면 무조건 알려주리라.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는 정보지만 선배들이 사전에 감지해 인사와 담판을 하든, 마음을 추스르든 시간을 가졌으면 했다.
퇴임을 당당하게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랐다.
떠나는 모습이 당당해야 한다.
회사생활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잘렸다고 해서 의기소침해 도망치듯 사라질 일은 아니었다.
나 역시 퇴임 과정을 그려볼 때마다 다짐했다.
통보를 받으면 부서원들을 모아 퇴임 소회를 이야기하고, 박스에 중요한 것들만 챙겨 당당하게 사무실을 나오리라.
그러나 현실의 내 퇴임 과정은 그다지 스무스하게 굴러가지는 않았다.
그날따라 아침부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팀장 자리 회의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조직도를 구상하고 있었다.
나는 팀장이 다른 팀으로 떠난 뒤 그 자리를 맡거나, 내가 원하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리라 생각했다.
그 외의 상황에 대한 조짐은 전혀 없어 안도하던 터였다.
그 해 사업이 워낙 어려웠고 최고 경영층의 사임도 있었기에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팀장들 여럿이 회사를 떠나거나 자리 이동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던 중, 옆 팀장님이 퇴임한다는 소식에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회의실 앞에서 후배가 내게 말했다.
“선배님, 퇴임 소문 들으셨어요?”
자리로 부리나케 돌아와 팀장에게 따져 물었으나 팀장 역시 금시초문이라 했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성과 때문은 아니다. 리더십 문제도 아니다. 윗분들과 사이도 평균 이상이다.
그렇다면 왜 나인가? 항변해야 하는가? 그냥 집으로 가야 하나?
그러다 인사팀장과 면담을 했고, 퇴사 통보를 받았다.
면담 내용은 아직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흔들리지 않는 폼을 유지하려 애썼던 기억뿐이다.
욕이 나올 수도 있었지만, 결국 ‘회사 내 자리 없음’이라는 메시지 앞에서 모든 게 구차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건 지금도 내게 후회로 남는다.
그때 책상을 엎어버릴걸.
그러나 나는 꼿꼿이 자리로 돌아와 부서원들을 모았다.
나의 퇴임의 변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고마웠다고 인사했다.
부서원 몇몇은 나를 따라 나와 마지막 배웅을 해주었고, 일주일 뒤엔 거한 송별회도 열어주었다.
평소 다짐했던 대로 비루하지 않은 이별이었다.
그럼에도 그 후 몇 달간은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나의 쓰임이 다했음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했구나.’
‘친절하기만 했던 팀장은 왜 아무 조짐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조직을 지켜내지 못한 경영층이 원망스럽다.’
후회와 분노가 반복되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나를 다독였다.
“그래도 성숙하게 마주했다.
한 직장에서 30년 넘게 버티며 끝내 임원까지 해낸 나, 그리고 마지막 순간마저도 흔들림 없이 맞이한 나.
30년의 회사생활과 함께 인생 1막을 단단하게 헤쳐온 나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간 참 잘 해내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무대를 향해 나아갈 차례다.”
� 이 글을 끝으로, 저의 회사 생활 기록 연재를 마칩니다.
30년 넘는 시간 동안의 기쁨과 좌절, 성취와 이별의 순간들을 글로 정리하며 저 스스로도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다음 연재에서는 회사를 떠난 이후의 제 삶을 담아볼까 합니다.
요가, 여행, 공부, 그리고 새로운 실험들 속에서 다시 시작한 저의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낼 예정입니다.
혹은 회사 안에서 경험했던 여성 리더십의 단면들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아직 방향은 고민 중이지만, 어느 쪽이든 저의 또 다른 2막을 보여드리게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