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다. 2주에 한번씩인데 꽤 잘 맞는 상담 의사를 찾은 거 같아서 좋다. 객관적으로 <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달까. 나를 <직면하는 시간>을 갖게 되어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취>를 '가장 큰 목표'로 삼으며 살아왔다.
어떠한 것을 시작하든 완벽하게 해내야 했고 1등이 아니면 스스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경쟁자에게 그리 질투를 많이 느끼지도 않았고, 누군가 나보다 잘 해내면 정말 아낌 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러기 위해서 정말 많은 시간 노력했을 테니까, 나보다 더 많이. 그 노력의 시간을 가늠할 수 있어서다.
그런 한편, 엄청난 승부욕은 나를 향한 칼날로 바뀌었다. 나는 어렸을 때 <괴물 같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 수식어를 좋아했다. 범접할 수 없는 자리에 서고 싶었던 거다. 누구도 쫓아올 수 없을 만큼 '특별한' 1위가 되는 것. 공부를 할 때는 명예와 돈을 다 거머쥐고 싶었고, 글로 방향을 틀고 나서는 최연소 등단해서 정말 기깔나는 작품을 하나 남기고 요절하고 싶었다.
죽은 자는 뛰어넘을 수 없다. 그는 찬란한 업적을, 작품을 남기고 죽었기 때문에. 빛나거나 1등이 아니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세상, 그게 바로 내가 살아온 세상이었다.
2017년 12월 18일, 샤이니 종현이 죽었다.
나는 그날이 너무도 선명하다. 나는 그의 팬은 아니었다. 그의 노래를 좋아했고, 꽤 괜찮은 아티스트라고 생각했지만 딱 그정도였다. 그런데 그날, 동생과 이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동생이 핸드폰에서 발견했다면서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 '머리가 딩- 맞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렇게 빛나는 사람도 그렇게 가는데
내가 뭐라고 살아 있지.
대체 내가 뭐라고 숨 쉬고 있지?
아주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2017년 12월 15일, 내 생일이었다. 10대 시절 나는 2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렇게 빌빌 거릴 줄 몰랐기에 생일도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3일 뒤 내 기준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이 스스로 떠났다는 소식을 받아 든 거였다.
상황이 한 몫 하기도 했다. 나는 2016년 8월에 방송작가를 시작했고, 엄청나게 헤매었으며, 몸과 마음이 아팠고, 방송 개편의 이유로 2017년 6월에 퇴사한 뒤 백수 신세였다.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중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전교권이었던 모범생은 없었다.
예술쪽이 아니면 지잡대 취급 받는 예대 문창과가 나의 학벌이었고, 프리랜서 방송작가로 고작 1년을 버텼을 뿐이었다.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잡지사나 출판사엔 가기 싫었다. 스펙 없는 상태로 뭘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고 했으나 맞지 않았다. 공무원 공부가 하기 싫어서 컴활 공부나 했고 필기는 붙었지만 실기는 하기 싫어서 학원만 다니면서 시간을 축내고 있는 시간... 나의 미래는 암울했다.
2017년 12월 18일 이후 나는 거의 일주일간 방 구석에 누워 있었다.
누워서 종현이 남긴 글들을 읽으며 엄청나게 울었다. 특히 날 울게 한 대목은 '이만하면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해줘'라는 부분이었는데, 이해가 됐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았을 것이다. 나는 그를 잘 모르고, 그저 브라운관 너머로 봤을 따름이지만 그 업계라는 곳이 얼마나 치열할지는 어림짐작할 수 있다. 예술이라는 게 그렇다.
공부는 순위라도 나온다. 얼마나 더 해야할지 가늠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술은 아니다. 무엇이 날 뽑게 하고, 무엇이 날 떨어뜨리는지 알 수 없다. 아이돌 세상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글쓰는 쪽으로 도피해왔을 당시엔 몰랐지만, 점점 하면 할수록 (특히 입시를 하면서) 느꼈으니까. 튀어야 산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제대로' 표현해내야 발탁할 수 있는 게 예술의 영역이다. 미친 듯이 갈고 갈고 또 갈아야만 한다.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SNS에서 올린 노래 디어클라우드의 <네 곁에 있어>를 정말 많이 들었다. 또한, 종현이 발표한 곡 중에서 <놓아줘>라는 곡과 그가 작곡하여 이하이가 부른 <한숨>을 정말 많이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그가 남겼던 마지막 글을 다시 읽어본다. 외울 만큼 읽고 또 읽었던 글들이 수년이 지나서 보니 다시 새롭고 또 여전히 서글프다. 그 시절, 2017년 12월에 생일이 지나서 스물다섯이었던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정말 많이 노력했다. 스스로 안에서부터 곪았다. 스스로를 탓하며 살았을 것이다. 완벽하기 위해 채찍질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는 정말로 빛났다. 그런데 나는, 단 한순간이라도 저만큼 빛났던 적이 있나? 나는 글로 데뷔를 하지도, 그렇다고 성공적인 시작을 하지도 못했다. 나는 빌빌거릴 따름이다. 그렇다면 다만 빌빌거리면서 비렁뱅이처럼 살기 위해서 내가 굳이 이 산소를 축내며 살아야 하나. 내가 뭔데?"
그 시절 나는 인터넷을 통해 확인 가능한 모든 방법의 극단적인 수단들을 찾았다. 지금 당장 죽으면 무엇을 해야할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죽음을 생각하는 건 쉬웠다. 열여덟, 공부를 다 내던지고 스스로 명문대-전문직 코스를 포기하고 앞날도 모를 '글쓰기'에 매진하면서부터 더 쉬워졌다.
스스로 살아야 할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내일 죽어도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방법을 다 찾아보고 난 뒤에 나는 울었다. 아니 사실, 스물 셋, 대학교 기숙사에서 이미 엄청나게 울었던 적이 있었다. 모르겠는데 나는 스스로 죽을 수는 없을 거 같아서 정말 펑펑 울었다. 왜, 어째서? 알 수 없었다.
1등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것도 기대할 가치가 없다 생각했던 열두 살, 스스로 공부를 내려놓고 글쓰는 걸로 도피했던 열여덟, 365일 중에 360일 가위에 눌리면서 정신이 들면 글을 쓰고 아닐 때는 뭐든 하면서 회피했던 스물 셋... 나는 오래도록 울증을 앓으면서 스스로를 직면한 적이 없었는데 스물 다섯, 바로 그때 직면했다. 결론은 없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스스로 납득 가능한 이유를 단 하나도 댈 수 없었다.
선두에 서는 순간의 희열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밑바닥에서 시작해 수직상승하는 사람이었다. 초등학생 때 미술학원 다닐 때는 매일 10시간씩 앉아서 그림을 그렸고 그 시간이 쌓였더니 상을 받았다. 초등학교 때는 쉽게 1등을 했었는데 중학교에 입학하자 전교 등수 70등이란 데 충격 받고 미치게 해서 졸업할 땐 10위권이었다. 학구열 높은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도 밑바닥이었다가 미치게 해서 공부 잘하는 애만 간다는 자율반에 들어갔다.
매 순간이 내겐 전쟁이었다.
나는 이겨야 했다. 나는 1등을 해야 했다. 나는 나의 결과물로 빛나야 했다. 내가 하는 과제들은 대체로 '교본'이 되었는데, 완벽해야 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시작한 일은 '최고'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최고'가 되는 순간의 '희열', 찰나에 찾아오는 성취가 짜릿했다. 허나 곧 허망해지고 말았다. 1등이 영원할 순 없기 때문이다. 반에서 1등이면 전교에서, 그러고는 전국에서를 따지게 마련이다. 공부든, 그림이든, 글이든 마찬가지였다. 결정적으로 공부를 내려놓고 글쓰기를 택했을 때, 내가 지망하는 예대라도 못가면 살 수가 없을 거 같아서 미치게 해서 수석을 했던 순간에도 나는 몇 분 기쁘고 다음순간부터 극심하게 불안했다. 나는 안다. 이뤄냈을 때의 희열과 그 직후에 찾아오는 허망함, 현타, 극심한 불안. 하지만... 성취했을 때 찾아오는 찰나의 '희열' 그 도파민을 대체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그래서, 그 '도파민'을 섭취하지 못하는 나는, 내 삶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수석을 한 덕분에 예대에 다니며 글을 쓸 수 있었고, 수석을 한 탓에 <내 글>을 쓰지 못했다. 그 부담감은 엄청나게 강했다. 입학 성적과 진짜 글실력은 다르고,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진짜 '내 글'을 찾아야 하는 건데 늘 듣는 평가는 같았다.
재밌는데, 사람이 없다.
사건과 상황이 좋은데 인물이 안 보인다.
작가가 모든 걸 통제하는 느낌이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이란 게 그렇다. 글을 쓰는 사람이 너무도 투명하게 보이는 예술이다. 내 안이 '텅' 비어 있거나, 내 가치관이나 신념이 꼬였거나 혹은 내가 '나 스스로를 탐구하는 걸' 회피하면 그게 티가 난다. 나와 함께 있던 동기들은 그러한 측면에서 특히 '예민하고 민감한' 글쓰는 사람들이었다.
매번 발가벗겨지는 기분으로, 나는 '최연소 등단'을 해서 요절하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최연소 등단'을 할 만큼 열심히 읽지도,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극작과, 영화과, 연극과를 들낙거렸고 충무로 오재미동에서 하는 영화 강의를 들었으며 꽂히는 영화를 수십번씩 봤다. 나는 날 제대로 들여다 볼 자신도 없었다. 얼마나, 무너질지 감이 오지 않고 감당할 수도 없는 나이어서 나는 끝없이 회피했고, 4학년이 되어서야 쓰고 싶은 글을 찾았다. 그때가 되어서야 내 옷을 찾은 거 같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는데, 졸업이 코앞이었다.
돈벌이를 시작해야 했다. 잠시 유예하고 6개월간 바이럴 마케팅 재택 알바를 하면서 글을 쓰겠다고 하다가 깨달았다. <진짜 인물이 비어 있다, 이건 단숨에 해결될 일이 아니다, 꽤 걸린다, 그러니까 돈부터 벌자> 그게 시작이었다. 스물 다섯, 갈피를 못 잡은 채 버둥거리던 나를 집밖으로 나가게 한 것도 바로 그거였다. <내 밥벌이는 내가 해야 한다. 내 몸뚱어리는 내 스스로 먹여 살려야지, 누구에게 손을 벌릴 순 없다.>
그러니까 나는 <빛나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라는 세계관에서 살아왔던 어린 시절을 뒤로 하고, <빛나지 않는 채로 이유도 모른 채 살아 있는 삶>을 살아가다가, 스물 다섯에 "일단 밥벌이를 해야겠다"라는 결론부터 내린 셈이다. "빛나지 않더라도 쓸모는 있어야 한다, 내 입에 들어갈 밥은 내가 벌어야 한다"로 전환됐다 하겠다.
스물 여섯에 광고대행사로 들어가고, 재작년이었던 서른까지 나는 정말 미치게 바빴다.
바야흐로 일을 불러 들이는 사람이었다. 잠잠하던 회사도 나만 들어가면 일이 늘었다. 돈이 벌렸다. 내가 몸을 갈아서 일했으니까. 남들 1년 하는 일을 나는 1달만에 해내고 있단 말도 들었다. 회사 일만 한 게 아니었다. 각종 모임에 나갔고 모임장이 되었고, 꽂히는 것들(영어, 봉제, 철학, 운동 등)은 모조리 다 배웠고 번 돈의 다수를 배우는 걸로 썼다.
쉴 틈이 없었다. 서른에는 주5일 일하면서 퇴근 후에도 일정을 소화하고 주말까지 나가는 통에 집에 있는 시간이 자는 시간 말고는 없었다. 그러니-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그 모든 걸 하는 와중에 나는 글도 썼으니까.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글을 쓰기 위해 '돈'을 버는 거였는데, 글'도' 쓰게 된 거니까.
이유는 단순했다. 글을 쓴다는 건 즉각적인 '쓸모'를 체감하게 해주지 않아서다. 나는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어야 내가 숨쉬고 살아 있는 걸 그나마 납득할 수 있었기에 나를 미친 듯한 일과 할 일들의 구렁텅이로 몰어넣었고, 정말 많은 일을 했다. 그랬더니 작년인 서른 하나부터 <현타>가 오기 시작한 거다. 똑같았다.
빛나기 위해 노력해서 1등을 찍을 때마다 느꼈던 허망함과 똑같은 종류의 것이다. 나는 몸이 정말 많이 아팠고 그렇지만 내 아픈 것따위 돌보지 않았기에 쉬었던 기간이 없다. 정확히는 쉬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몸을 갈았던 것에 비해 생활, 살림살이가 거지 같은 거다. 월급도 고만고만했고, 명문대-대기업 루트를 탄 사람과 비교하면 내 커리어는 거지 같았다. 신사업부, 스타트업에서 좋아하는 인재상이랄까.
그래서 작년부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지금 회사는 워라밸은 있지만 딱히 쓸모 있는 일을 하는 곳은 아니다. 커리어에 보탬되는 곳도 아니다. 내가 효용성의 영역에만 있었다면 당장 다시 내가 key를 잡을 수 있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글을 쓰고 싶다>라는 데 있다.
나는 1등을 했을 때의 희열을 안다.
바닥에서 위까지 올라갔을 때 정점을 찍었을 때 짜릿함을 안다. 그것이 정말 전국구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하기 전에 아파서 포기했다는 분노(특히 열여덟에 난독증과 환청으로 인해 공부를 놓은 것)가 있긴 한데 어쩔 수없다, 내가 아팠는데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리고 쓸모의 세계도 안다. 일잘러로 불리면서 인정 받지만 온갖 뒤치닥거리와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도 해봤다.
그렇다면 나는 <괴물 같다>라는 수식어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에 머물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결국에 나는
1등도 아니고, 빛나지도 않고, 쓸모로 증명받지도 않았을 때
아무런 수식어도 없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대체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내가 살아서, 산소를 축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상담을 받고 난 뒤에 아주 근원으로,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 삶의, 존재 가치에 대해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 채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꽤 오래 해왔고 이게 잘못됐다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말했다.
선두로 가고자 하는 것, 쓸모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정체성이었는데 그걸 다 바꾸려고 하면, 그게 없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게 당연하다고. 그렇구나, 그게 당연하구나. 생각하고 보니까 눈물이 정말 많이 났다. 흔들릴 수밖에 없구나, 당장에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나를 욕하고 비난하고 탓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서. 단번에 답이 나올 순 없고, 찾아가는 것이라는 말에서 나는 안도했다.
조금씩 잘, 나 스스로와 소통하면서 찾아가도 괜찮구나.
조금 느리게 살아도, 정체성이 다 무너진 채 살아도 괜찮구나.
나란 사람은 사실 열여덟에 모조리 다 무너졌다.
선두,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순간에서.
글쓰기로 그렇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바로 그래서 수석이 되기 위해 미치게 노력해봤었지만, 정작 대학에 가서 본 세계는 그게 아니었거든. 글은 '순위'를 매길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순위의 세상, 전장터에서 살아온 내겐 너무 힘들었고 그렇게 마음 안에 '나를 지탱하는 기둥 하나' 없는 채로 10여년을 살아 왔다. 심각성은 종종 느꼈는데 스물다섯에, 스물여덟부터 작년까지 정말 많이 느끼면서 나는 살아왔고 이제는 나라는 사람을 '다시' 쓰려고 한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나에게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해 물어가면서.
그래, 아직 답이 없다.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나는.
나는 여전히 내가 왜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 행동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찾아본 무수한 방법 중에 마음에 차는 방법이 하나도 없어서였다. 어떠한 방식을 택하든 남아 있는 자에게 민폐가 되었다. 사는 게 가치가 없어서 죽는다는 건데 고작 나따위 죽는데 다른 사람한테 폐를 끼친다고? 뭐 그런 거다.
표피적으론 그렇고, 근본적으론 여전히 나는 궁금한 거 같다.
어릴 적에 나는 사랑 받고 싶어서 1등을 하고 싶다 생각했으니까. 나 정말 사랑을 많이 받고 싶었구나... 스스로 속삭이면서 어제 밤에 꽤 울었다. 사랑 받고 싶어서 1등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서, 내 삶의 key를 내가 잡고 싶어서, 까탈스러운 내가 선택권을 갖고 싶어서 공부를 했다. 선두권에 서면, 어떤 자리든 우두머리가 되면 그 통제권을 '완벽히 잡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언제까지, 어디까지 우두머리로 올라가야 하는가.
위에는 더 많은 '윗동네'가 있고, 산봉우리를 오르면 더 많은 산봉우리가 보일 따름이다. 척박하고 허망하다.
결국 난 자유롭고 싶었고, 사랑 받고 싶었고, 마음껏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바로 그래서 내가 글을 썼을 거다.
열여덟, 가장 아팠던 그 시절에도 매 순간에도 아플 때마다 글을 쓰며 숨을 쉬었을 거다.
타자 소리가 날 때, 키보드를 마구 두드려댈 때 아무 말이라도 쓰는 순간엔 숨을 쉴 수 있었으니까.
흔들리는 게 당연하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기대가 되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스스로 물어봤을 때 오늘은 이런 이야길 일기에 썼다. "좆같은 세상이 마냥 좆같지만은 않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 다름 아닌 나와 같이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비속어 죄송하다. 근데 딱 이 심정이었다. 내가 살아온 세상이 참 척박하고 황량하고 고단하고 괴로웠으니까.
글이란 건 그러니까, 나와 마음이 딱 맞는. 내 이야기를 메시지를 좋아하는 사람들 몇만 잡아도 행복한 거다. 일기가 아니라, 들리기 위해 쓰는 거니까. 어쩌면 내가 쓰는 소설이란 콘텐츠는 살아가는 나란 사람의 '삶을 향한 분투기'가 아닐까.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살고는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살아보자. 오늘 그리고 내일, 힘들면 오늘 밤 노을이 지는 순간에서 내일 아침 동이 트는 순간까지라도.
무엇보다 나는 내 이야기가 재밌다. 그러면 된 거다, 우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