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창작뽕이 뭐냐고?
말 그대로 '창작자'로 사는 시간을 채우는 것
나는 우습게도 '키보드 두드리는 행위'가 좋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글을 쓰기 시작해서 무언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게 되면, 내가 캐릭터에 빙의하듯 꽂혀버리면, 여덟시간이고 열시간이고 앉아서 키보드를 쳤다. 다다다다닥 울리는 소리가 꼭, 심장 박동 소리 같았다.그래, 나는 열일곱부터 소설을 썼고, 서른 중반인 지금까지 쓰고 있고, 글을 쓰는 것만큼 재밌는 일은 일평생 찾지 못했다. 정말이지, 창작이란 끊을 수 없는 중독, 포기할 수 없는 단맛이다
대학 졸업 시점에 "이번 생은 시를 쓰기로 했어. 그러니까 알바하면서 시 쓸 거야"라고 말하는 동기가 있었다. 대학원에 입학하며 "지금 학자금 대출로 진 빚이 삼천이 넘었는데 몇 백 더 한다고 내 인생이 달라지진 않아"라고 말하는 동기도 있었다. 나는 그럴 깜냥은 안 됐다.
학자금 대출로 진 빚이 1천만원이 넘는다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골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면서 지갑에 얼마쯤 남았을까 돈을 세어보는 삶을 살 자신도 없었다. 먹고 싶은 것도, 입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있었다. 일정 수준의 돈이 수중에 없으면 당장 불안했고, 지방에서 상경했기 때문에 월세 낼 돈이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우리 학교, 우리 과. 예술 분야에서는 알아주지만, 그 영역 밖으로 나가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빠르게 취직할 길을 찾아 방송국에 작가로 들어갔고, 건강이 좋지 않아 광고대행사로 갔다. 광고대행사도 극악한 환경이었지만, 방송국보다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이었다. 신사업부, 신규프로젝트를 맡아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스펙이 1줄도 없었지만 내가 만들었다. 내달렸고, 새벽까지 야근했고, 이직을 거듭하며 연봉을 올렸다. 그 와중에도 '글'을 놓지 못했다.
자정까지 야근하고 돌아오면 새벽까지 뭐라도 썼고, 출퇴근길에 썼다. 상대적으로 널널한 회사에 들어가서 정시퇴근이 지켜질 때는 퇴근 이후에 썼고, 출근 전에도 썼다. 그렇게, 공모전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퇴고할 여유도, 시간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로 '연습'도 되지 않은 나는 내가 만족할 만한 글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지금까지 갖고 있다. 회사가 내게 일용할 양식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회사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 결국 몸이 아프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재미가 없어. 아침이면 지옥철에 끼이고, 퇴근길에 다시 지옥철이 끼이고. 회사 일은 하는 사람한테만 몰려닥치고 정치질 하는 것들은 바라만 봐도 피곤한데 꼭 희생양을 찾고 있고. 회사라는 공간은 그러니까 일종의 '전장'이지. 나와 같은 '종'만 존재한다면 편했을 텐데, 나와 완전 다른 '종'들이 공존하며 밥벌이를 하는 곳이라,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지리멸렬한 것도 어쩔 수 없지.
어느 모임에 갔는데 참가자가 그런 이야길 했다. 예술을 자긴 이따금 수혈한다고. 생에 지쳐 있다가 좋은 공연, 영화, 책을 보았을 때 목에 딱 호스가 꽂히는 것처럼, 짜릿하게 수혈하면 이제 또 살아갈 수 있다고. 수혈이라곤 아이스 아메리카노밖에 안 해본 내게 깨달음을 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 지친 사람에게 위로가 되었든, 재미가 되었든, 희열이 되었든, 분노가 되었든 읽는 사람의 가치를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창작자라면,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우선이 아니라.
또 최근에 한 배우가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걸 봤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겠다는 대본이 들어와서 봤는데 내용이 딱 끌리진 않아서 고민하던 중에 다른 배우한테 그 말을 들었다고. 그 대본이 책이라고 한다면 선물하고 싶겠냐고. 그렇지 않아서 거절했단 말에서 깨달았다. 나에게, 친구에게,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글'을 쓴다면 참 좋겠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말을 좋아한다. 이십대까지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있어서 생이 길게 남아 있다는 게 지독하게 괴로웠다면, 삼십대 중반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 서 있으니까. 여전히 가끔 생이 못 견디게 버겁지만, 그런 날엔 키보드를 마구잡이로 두들기면서 시원하게 울고 나면 좀 낫다.
살풀이, 글로 푸는 살.
글로 추는 춤.
글로 하는 굿.
글로 그리는 그림.
글로 함께하는 기도, 사랑, 위로, 염원
그리고 함께 웃고 우는 것.
현대무용을 배워보고, 직접 보러 다니고, 극단에 들어가서 연기를 짧게 해보고, 무대에 서 보니 알겠다. 그 모든 스포트라이트 뒤에 있더라도 글 쓰는 게 더 좋다. 창작은 참 잔인해. 그 외에 모든 것에서 그만큼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살아가는 것으로 내 인생의 책만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쓰는 것으로 '백지 위의 창조주'가 되어버릴 기회인데, 맛본 이상 중독되어버리는 건 당연한 지도 모른다. 입학식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떤 선배가 우리 과 소개를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백지 위의 창조주." 얼마나 짜릿한 말인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내 가장 큰 숙제는 '인물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재밌는데 인물이 죽어있단 말을 많이 들었다. 작가의 자아가 너무 크고, 인물이 작가의 꼭두각시 같단 말에 부정할 수 없었고, 단기간 내에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 돈벌이를 택했다. 지금의 나는 글 안의 인물이 살아 있단 이야길 듣는다. 그것만으로도 밥벌이 하느라 구르고 굴렀던 내 개고생이 의미가 있어진다.
그러니까 이젠 내가 하고 싶은 일로 고생해야지. 그 고생은 고생도 아닐 테니까. 붉은 말의 해, 뜨겁고 장열한 불에 기꺼이 뛰어들어 창작혼을 불태우겠다. 창작뽕으로 버티는 게 아니라, 창작혼으로 살아갈 날들을 위하여. 올해가 지독했던 만큼 그 어느 때보다 내년이 기다려 진다. 이제 딱 하루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