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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 Nov 02. 2023

그렇게 휴직러는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01.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보세요!


© lesargonautes, 출처 Unsplash


  지인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최근의 내 심경에 대해 털어놓자 그러는 것이다.


  - 휴직한 사람들이 쓴 에세이를 보면 약속이라도 한 듯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더라구. 뭐가 있긴 있나 봐.


  - 그건 정말 추천할만해요. 저도 가본 적 있거든요.


  그는 전문직이었다. 굉장히 높은 연봉을 받고 있었고, 직장생활도 나보다는 훨씬 대접받으며 할 확률이 높았다. 그런 그가 뭐가 부족해서 산티아고 순례길까지 걸을 생각을 했을까? 


  글쎄, 진취적인 성향을 가진 그에게는 흔한 여행지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02.


  - 너 정도 되는 사람이 그런 고행길을 떠났다니 의외인 걸?


  - 제 버킷리스트이기도 했어요.


  역시, 이 친구에게는 레저에 가까운 느낌이 아니었을까. 


  - 저 스페인어 배운다고 했던 거 기억나세요?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이 친구가 스페인어를 배운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독학으로 말이다. 알고 보니 그것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위한 준비였다고 한다. 장거리를 걷기 위해 마라톤 연습까지 했다고 하니 새삼 대단해 보였다.


© dchuck, 출처 Unsplash


  - 저도 당시에 다니던 직장이 너무 힘들었거든요. 이 악물고 버텨서 이직 준비하는 기간 동안 다녀왔어요. 사표 처리되자마자 바로 다음 날 비행기로 떠났죠.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이 친구에게 그런 시기가 있었을 줄이야.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부침이라곤 없이 살아왔을 것 같은 그의 입에서 <힘들었다>라는 얘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03.


  - 너 참 대단하다. 내가 읽은 책에서는 두 달은 걸린다던데.


  - 저는 40일 정도 걸었던 것 같아요.

 

  - 그래서 깨닫게 된 게 있었니?


  - 다른 건 모르겠고.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건 확실해요.


  - 멋지다.


  - 형님도 가면 되죠! 스페인으로 가세요!


  <걷기멍>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걷는 행위> 자체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반복적인 행위를 지속함으로써 잡념을 없앨 수 있는 한편, 느릿느릿 바뀌는 풍경을 보며 의식의 환기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고민거리가 생기면 걸으러 나간다. 외출을 못할 상황이면 러닝머신이라도 탄다. 운이 좋을 땐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좋다.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난 산티아고에는 큰 뜻이 없는데.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하염없이 걷고 싶은 마음은 들어.


  - 그럼 제주도는 어때요? 제주 올레길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거래요.


  - 그래?


  그것이 내가 제주도로 떠난 이유이다. 그와 함께 저녁식사를 한 다음 날, 나는 몇몇 올레길을 알아본 뒤 제주행 비행기 티켓과 숙소들을 예약했다. 그리고 며칠 뒤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착할 곳이 어떤 환경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작은 모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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