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同行)
젊은 시절 패거리 정치에 함몰되었다가 정체성이 확립되면서 패거리 정치에 실망이 컸던 기억이다. 야당 지도자라면 무조건 멋있어 보였던 적이 있었다. 야당 지도자도 전라도 대표와 경상도 대표가 있어 그 사람의 정치적 식견보다는 민주화 한마디에 매몰되어 무조건 좋아했고 민주화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의 책을 무조건 탐독하기도 했다. 나의 식견(識見)이 조금 정립되고는 패거리 문화에 염증을 느꼈다. 교직 생활을 시작하자 특정 고등학교 출신이 숫자가 많고 힘이 있어 보였다. 그 당시 서울 시장을 지낸 고건 시장님의 아버지 말씀에 집중했다. “돈 받지 마라. 누구의 사람이라는 소리 듣지 마라. 술 잘 먹는다는 소문 내지 마라.” 누구의 사람이라는 소리는 듣지 말자. 말에 집중하여 나 홀로 교직을 한 기억이다.
이제는 패거리가 아니라 유유상종(類類相從)이 가슴에 와닿는다. 유유상종은 ‘끼리끼리 논다.’이다. 어원을 보면 제나라 선왕이 순우곤에게 전국에 인재를 구해 오라고 하니 한꺼번에 7명을 천거했다고 한다. 1명의 인재도 어려운데 7명을 구했느냐고 하자 유유상종의 논리로 설명했다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 진다. 젊은 시절에는 교류하는 폭도 넓고 깊이가 있으면 더 좋다는 생각으로 인간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연유로 마음을 다치기도 하고 주변 사람이 미운 사람도 생겼다. 최근에는 이제 인간관계도 자연스럽게 정리되면서 같은 생각, 같은 부류와 어울리는 일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은 서서히 정리가 되고 오랜 친구들만 남아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나 45년 이상을 교류하는 친구가 있다. 대학에 입학하여 학교는 달라도 많은 시간을 같이 놀았고 군대에 입대하는 날은 만사를 제치고 군부대 입구에서 배웅하고, 결혼식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피로연까지 같이 하며 우정을 과시했다. 결혼 시기와 아이 출산이 비슷하여 아이들이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가족 모임으로 전국 각지를 여행하였으며 중학교 진학하고 대학 들어갈 때까지 10년 동안은 부모상이 있으면 조문하러 가서 만날 정도로 가정에 집중하다가 각 집에 둘째가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 부부 동반으로 전국에 경치 좋은 관광지 콘도에 모여 자주 우정을 나누었다. 열심히 살았던 결과로 50대 이후는 경제적 안정이 되어 지방에는 작은 농장도 하나씩 마련하는 여유로움도 마련했다. 최근에는 부쩍 자주 만난다. 만나고 난 후 마음이 편하고 여운이 남기 때문이다. 유유상종하기 위한 조건을 알아보자. 이것은 필자의 개인적 체험에서 오는 소견임을 밝혀둔다.
친구들의 특징이 첫째로 베풂과 배려를 우선하는 친구들이다. 어느 집단이든 베풂과 배려가 된다면 싫어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것이 일회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일 때 믿음이나 신뢰는 더 확고해진다. 베풂의 길은 물품의 나눔과 정신적인 나눔이 있다. 물품 나눔은 고가(高價)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정성이 담긴 물품이다. 정신적인 나눔은 경제적이든 직업적이든 각자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인정하는 일이다. 콘도에서 모임을 하면 집에 있는 좋은 주류를 가지고 온다. 선물 받은 산삼주도 가지고 오고 30년 된 양주와 값비싼 포도주도 고향 전통주도 가지고 와서 파티는 소주로 한다. 그리고 집에 갈 때는 각자 필요한 술을 나누어 가지고 간다. 그리고 사는 지역이 틀려서 모임을 그 지역에서 하게 되면 그 지역에 사는 친구 집에서 잠을 자고 풍성한 대접을 한다. 요즘 자기 집에 누가 오는 것을 좋아할 일도 없는데 흔쾌히 초대하고 재워준다.
둘째는 소통과 담론이다. 우리 몸에 피가 잘 돌면 아픈 곳이 없듯이 인간관계도 소통과 담론이 잘 되면 다툼도 없고 오해할 일도 없다. 45년 동안 많이 만나고 많은 놀이와 여행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싸운 일이 없다고 서로 자부한다. 마음이 평정한 사람들이다. 옛날 선비들이 친구가 찾아오면 버선발로 뛰어나가 방으로 모시고 서로 큰 절을 하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그것이 예법이다. 상대를 최대한 존중하는 의식부터 행하고 대화를 하니 자연히 대화는 품격이 높아지고 논쟁은 할 필요가 없어진다. 우리 모임에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 조곤조곤 이야기 해도 경청한다. 상대에게 다른 의견이 있으면 다 듣고 상대의 말이 맞지만 내 생각에는 이렇다고 이야기한다. 담론의 규칙이 상대의 권리를 인정하고 누구나 소통에 참여할 자격이 있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경청하는 자세이다. 이것을 완벽하게 습득하고 대화의 장에 나선 사람들이 이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셋째는 기획력과 인정(認定)이다, 필자가 모임의 임시 총무를 맡아 돈 관리도 하고 행사를 명목상 주관한다. 실제는 해당 지역에 사는 친구가 기획하고 행사를 진행한다. 작은 행사지만 기획력이 뛰어나고 참여하는 사람은 기획한 사람에게 무한 신뢰를 보낸다. 최근 행사를 보면 이언적 선생을 모신 옥산서원을 방문하고 점심 식사 후 찻집에서 수다 떨기, 미술관 방문, 농장에서 만찬을 하는 일정 모두 감탄을 했다.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고 알차고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모범 사례를 소개하면 월 회비 만 원을 걷는다. 이 돈으로 첫해는 회원들의 생일을 챙겨주고 다음 해는 아내의 생일을 챙겨주고 다음은 살아계신 부모님과 처가 부모님의 생신을 챙겨주었다. 특히 처가 부모님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선물이 도착하니 그 기쁨은 매우 컸다는 후문이다.
넷째는 의리(義理)와 신뢰(信賴)이다. 속마음이야 모두 알 수 없지만 겉으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의리와 신뢰를 바탕으로 실천한다. 친구 중에 어려운 일을 겪으면 마음으로 위로하고 경제적으로 도움이 필요하면 똑같이 모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에 따라 기부하고 액수는 공개하지 않는다. 무주상보시(無住常布施)의 실천이다. 물론 약간 어렵다고 도움을 요청하는 친구는 없다. 다른 친구들 모임에 돈 문제로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려 해산하는 팀을 보았다. 우리는 월 회비를 내고 모임마다 회비로 충당한다. 기부금은 잘 받지 않는다. 그래서 베풂과 배려로 신뢰를 쌓는다. 회비 감사가 없다. 담당하는 사람을 신뢰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에서 대례(大禮)는 필간(必簡)이요, 대악(大樂)은 필이(必易)다. 간이(簡易)란 말이 여기서 나온다. 인간관계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부자지간에도 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집이 많다. 문제해결은 쉽다. 간단하고 쉽게 해결하라. 먼저 베풀고 배려하고 소통하며 서로 인정하고 견리사의(見利思義) 정신으로 신뢰를 쌓으면 시간이 갈수록 우정은 더 돈독해진다.
부모, 형제도 동행 하기 힘든 세상이다. 농업사회의 토착화된 인정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의 움직임에 따라 유목민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한평생을 동행한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의 밑바탕이다. 어제 추석이 지내며 친구와 통화를 한다. 우리 “90살까지는 모이고 웃고 떠들어야 안 되겠나?” “당연히 그래야지”
2024. 9. 19 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