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흔적들을 위한 헌사
2018년 8월 25일에 쓴 글.
일본의 영화는 언제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 중에서도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내가 타인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언제나 등장하곤 하는 단골 손님이다. 물론 그의 인간성이나 됨됨이, 걸어온 족적 중 손가락질 받을 만한 일들에 대해서는 일말이라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처음 그의 영화를 접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고 그는 나에게 그지 깽깽아, 이게 임마, 영화다, 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최근에 <소나티네>를 비롯한 그의 영화를 다시금 접하고 논할 기회가 생겨서 그렇지, 사실 대부분의 일본 영화는 나를 구성하는데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요소이자 영감이다. 아니, 그냥 일본의 문화 자체가 나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것 같다. 만화도 그렇고 영화도, 음악도. 만화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아직도 내가 최고로 꼽는 ‘좀비’ 영화라고 한다면 바로 <아이 엠 어 히어로>다. 이 끔찍한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인물은 바로 사토 신스케인데, 그는 일본 만화의 또 다른 명작인 <간츠>와 <블리치>, <데스노트>를 실사화 하기도 했고(성공 여부는 모른다, 전혀.), 개인적으로는 신선하게 본 ‘도서관 전쟁’으로 기억하고 있다. 신스케 감독은 움직임을 색다르게 표현하는데 있어서 탁월하다고 개인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인간의 관절이나 근육으로는 재현할 수 없는, 그러니까 과하게 부드럽다거나 정신없이 역동적이라고 보여지는 것, 분명 그것이 CG로 연출된 것임을 의심의 여지가 없이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인간육체와 결합되어 관객으로 하여금 극악의 불쾌함을 느끼게 하는 것 등.
호러나 스릴러 장르, 야쿠자 액션과 같은 특이한 장르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곤 하는 일본 영화는 사실 영화를 찍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 다루는 메타 영역에서도 놀라운 힘을 보여주곤 한다. 캠코더를 들고 뛰어다니며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영상물을 담아내려는 젊은 인물들이 스크린 곳곳을 누비는 장면들, 꿈과 희망에 대해서 논하기도, 과도하게 꿈이나 희망에 대해 집착하며 열정에 지친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해서 역설하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 있어서는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라는 작품이나 소노 시온 감독의 <지옥이 뭐가 나빠>와 같은 작품들에서 나는 개인적인 감동을 받았다.
(공교롭게 모두 13년작이다. 13년도는 대단한 해.)
이번에 본 영화는 우에다 신이치로 라는, 이름도 생소한 감독의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다. 알고 보니 올해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고. 며칠 전에 왓챠 앱에는 이 영화가 ‘공포’ 장르로 게재되었는데 현재는 ‘코미디’로 수정되었다. 나는 애초에 이것이 ‘공포’라는 장르로 소개된 것에서 흥미를 느꼈다. 누가 봐도 B급 포스터에 웃음 유발일 것 같은데 정말 진지한 장르영화인가, 하면서. 제목에서부터 풍겨오듯 이것은 영화를 찍는 행위에 대한 영화이며 게다가 앞서 말한 ‘좀비’라는 특수한 장르의 전유물이 합쳐진 작품이다.
(굳이 이 얘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앞선 이야기를 이런 방식으로 소비해야했는가에 대한 반성도 한다. 하지만 이미 썼으니 귀찮다)
‘카메라를 왜 멈추면 안되지? 카메라는 열정을 의미하나? 그렇다면 또 꿈과 열정, 인생에 대한 훈훈한 영화일까?’와 같은 불신을 처음에는 감출 수가 없었다. 기대는 되는데 뭔가 맥이 빠지는 조합이다. 좀비 영화는 몰입감이 생명이라 적어도 러닝 타임 내내 ‘아, 진짜 같다!’ 라는 생각이 들게끔 해 주는 것이 포인트인데 어차피 메타 영화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고백하는 것에 다름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생각보다 많이 괜찮았다. 신선한 전개 방식과 구성이 승리했다고 본다.
러닝타임은 약 95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의 도입부부터 중반까지의 장면이 모두 롱테이크, 아니 단 한 번의 편집도 없는 ‘원 테이크’로 진행이 된다. 폐쇄되고 오래된 공장에서 좀비물을 찍던 배우와 촬영팀은 갑자기 분장한 배우가 연기하는 좀비가 아닌 진짜 좀비와 마주하게 된다. 역동적인 핸드헬드 촬영 방식으로 꽉꽉 채워진 약 30분 간의 단편 영상은 대놓고 B급 냄새가 폴폴 풍기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우여곡절 끝에 홀로 살아남은 여주인공의 모습을 카메라가 응시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싶었으나 영화는 본격적인 서사로 진입하게 된다. 화면전환을 비롯한 편집은 일절없이 극악의 원테이크로 녹화된 영상물이 탄생하게 된 약 한 달 간의 작업과정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재현 영상을 만들고 저예산에 빠른 속도로 작업을 하는 것을 직업적인 모토로 삼는 감독인 ‘히구라시 타카유키’. 아내 ‘하루미’는 비록 은퇴했지만 배우였고, 딸인 ‘마오’는 영화 감독의 꿈을 키우며 촬영 현장의 스태프로 고군분투하는, 이른바 ‘방송연예계’ 가족이다. 그러나 어쩐지 서로의 관계는 소원하기만 하다. 이제 막 사회로 나아가 꿈을 펼치고 싶어하는 딸에게 부모는 현실에 무기력하게 타협해버린, 한심하고 무능한 기성세대로 보이기 때문.
그러던 타카유키에게 그간의 작업과는 다른 의뢰가 들어온다. 바로 원테이크의 생방송으로 시청자들에게 실시간 좀비물을 방영하는 것. 돌발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만 같은 이 프로그램을 맡으려는 감독은 아무도 없다. 타카유키 역시 의뢰를 고사하려 하지만, 마오가 열렬히 덕질하는 배우인 ‘카미야 카즈유키’가 이 방송의 배우로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마오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또한 감독으로서 더 이상 물러서지 않으려는 타카유키는 결국 이 극악한 프로그램의 메가폰을 잡게 된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는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관객들에게 알려준 뒤, 앞서 제시한 저예산 B급 단편 좀비물의 기획과 제작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피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누가 배우의 얼굴에 뿌리는지, 좀비 역할을 맡은 배우의 목이 잘리는 장면은 어떻게 연출이 된 것인지, 배우들이 주고 받는 대사는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말이다. 즉, 이 영화의 본질은 단편 영화의 탄생 과정을 그린 ‘제작기’이다.
누군가는 미리 제시된 단편을 보는 내내 의문이나 반발감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밖에 만들지 못하나? 내 돈 내고 이런 영화를 보아야 하나? 좀 더 잘 할 수는 없었던 건가?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러한 의문이나 반감을 너무 섣불리 가진 것은 아닌가 하며 자성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는 한 명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라온 환경과 삶의 방식이 모두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는 그 엷은 하나의 목표로 뭉쳐 만드는 협업이다. 누군가는 돈 때문에 누군가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또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 움직이겠지만, 목적이 얼마나 숭고한지 속물적인지를 떠나서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영화는 세상의 빛을 볼 수가 없는 까다로운 녀석인 것이다. 누군가는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물을 먹으면 배탈이 나 촬영 현장에서 집중할 수 없다. 누군가는 모두가 자신의 집중을 도와주지 않으면 촬영에 임할 수가 없다. 혹자는 인공 눈물의 도움을 받아 촬영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진짜 눈물을 흘리고 정말로 울어야 더 나은 작품이 탄생한다고 믿는다. 똑같이 죽어라 노력해도 누군가는 걸작의 일등공신이라고 추켜 세워지지만, 심지어 그 누군가보다 갑절의 노력을 한 누군가는 단지 ‘스태프 1’로 기억된다. 아니 혹은 아예 기억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완성된 창작물을 받아 든 시청자들에게 사실 그런 것은 별로 주의 깊게 살펴볼 요소가 되지는 못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얼마나 많은 노력이 투입되었는지 그 서사를 알 필요는 없다. 상업시장의 도마 위에 오른 창작물이 관객이 납득할 만큼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사실 그 작품은 실패한 것이다. 과정은 설령 인생에서 지우지 못할 기억과 뿌듯함을 줄 수도 있겠지만, 결과는 부와 명성을 주니까 말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라는 작품이 서사를 구성하는데 있어 먼저 과정이 아닌 ‘결과물’을 제시한 데는 바로 그러한 판단을 잠시만 유보해달라는 의도가 숨어 있다. 소위 피땀눈물을 흘려가며 만든 작품의 과정은 이렇듯 치열하고 결과물은 이러하다- 라는 식의 서사로 구성한다면 관객들의 기대 역시 자연히 높아진다. 그만한 노력을 투자했는데 나온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않는다면? 그건 뭐 팩트고, 힘들고 암울한 노동현장을 제시하는 것의 가치는 있겠지만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각 잡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어 더 효과적일 것이라 본다.
이 영화는 그러나 보이지 않는 흔적들을 향하고 또 위하는 헌사로서 기능한다는 가치에 더 역점을 둘 수 있다. 스태프들은 물론이며 주목 받는 배우들과 감독들 간의 갈등이나 싸움도 이에 해당한다. 그들은 마치 현장 곳곳에 뿌려졌지만 이내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핏자국들과 같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라는 작품은 바로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어 주는 루미놀 용액과도 같은 힘을 발휘한다. 원하는 장면을 얻기 위해, 원하는 이상을 얻기 위해 길지도 않은 몇몇 순간을 움켜쥐기 위해서 그들 혹은 나 혹은 당신들은 아무도 모르는 노력을 붓는다. 작품은 그것을 조명한다.
거대 자본을 주무르는 기업은 이들의 노력을 쉽게 산다. 불가능해 보여도 되게 하고, 아님 말고. 잘 되면 저희들끼리 모여 회식하는 거다. 아니면 그들에게 호통을 치는 거고. 잘 되도 본전인 이 기형적인 구조가 실상이다. 이 영화가 가진 설정이 사실 너무나 극단적이긴 하지만 1시간 30분의 러닝타임으로 이러한 갑을 관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효과적이지 않나 싶다. (누가 30분동안 원테이크 생방송을 내보내겠나.. 이런 기획안 올린 PD는 그냥 조용히 정리될 것이 분명하다.)
우여곡절과 고군분투로는 설명될 수 없는 촬영이 끝나고 한 숨을 돌린 감독과 배우, 연출팀이 웃음 지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때부터 다시 시작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이번에는 ‘진짜’ 이 영화를 만들며 찍었던 실제 스태프들이 화면에 담긴다. 스태프를 연기한 연기자가 아니라. 작품의 스태프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찍는 ‘진짜’ 연출팀. 관객은 한 번 더 액자에서 걸어 나온다. 그리고 불현듯 드는 생각은, 아, 진짜 저렇게 하는구나, 진짜 말도 안되는 것들을 해내는구나, 아. 어쩌면 편집이나 컷 없이 무작정 흘러가는 야속한 생방송이 사실은 우리 인생과도 같을 수도 있구나. 대본을 만들 수는 있지만 돌발상황은 언제나 온다.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리는 편이 좋지만 그 마저의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 인생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영화를 통해 모든 영화를 경외감에 차 바라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도저히 눈이 달린 이상 못 봐주겠다고 여겨지는 영화는 오히려 보는 것이 인생의 낭비다. 그들에게 비판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사정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생각이나 이유 없는 과도한 ‘비난’을 감내해야 하는 영화들도 많다. 필요 이상으로 가혹해진 세상이다. 영화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긍정적인 모습도 있지만, 한낱 임의적인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가해지는 무자비한 공격에 많은 것이 꺾인다. 이 영화도 비판할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위적인 가족 이야기나 조금은 억지스러운 캐릭터 설정들, 일본 특유의 열혈 캐릭터들이 자아내는 클리셰와 같은 행동들이 눈에 밟히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이 영화를 응원하고 싶다.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잘 해 냈기 때문이다. 모두가 멋진 CG에, 거물급 배우를 동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두가 그러면 재미도 없다.
영화에서 히구라시 타카유키 감독 역할을 도맡은 배우 하마츠 타카유키는 알고 보니 일본의 코미디언과 DJ를 한 경력이 있다고 한다. 배우로서 영화에 참여하는 것은 처음인 셈이라고. 이 영화의 등장하는 배우들을 검색해보면 모두 이 영화가 첫 작품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배우의 캐스팅 과정이 독특해서다. 감독은 신인 배우들을 데리고 워크샵에 가 직접 연기지도를 한 뒤에 자신의 영화에 출연할 배우들을 발탁한다고 한다. 게다가 그들은 대본에 맞춰 캐스팅 되는 것이 아니라 뽑힌 배우들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대본이 쓰여진다고. 독특하고 흥미로운 방식이다. 신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운 연기가 뽑힌 것은 아마 이러한 노하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감독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소중히 여기는 인물일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예전에 친구랑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그 친구는 누군가 음악 작업을 마치고 앨범을 내면 그 앨범 커버의 디자인을 해준다. 한국에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으레 그렇듯 그 바닥이 꽤나 좁기 때문에 여차하면 자신이 동경할 만한 위치(막 엄청 탑클래스는 아닌)에 있는 사람과의 연락이 닿기가 쉽다고 한다. 어느 날, 그런 디자이너들과 음악 하는 사람들이랑 모여서 워크샵 비슷한 걸 하는데, 자기가 동경한 뮤지션을 만났다고 했다. 그와 작업하는 것이 꿈만 같았고 역시나 그의 작업물에 감탄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는 와중에 그가 워크샵에서 남은 음식들을 싸 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자신이 동경하는 위치에 서 있는 존재가 남은 음식을 몰래 가져가는 모습이 그 친구에게 적잖이 충격이었나 보다. 열심히 노력해서 저 위치에 가 봤자 결국에는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을 아닌 척 노려보다가 몰래 비닐에 싸서 냉장고에 넣어 놓은 뒤, 입맛을 다시며 데워 먹는 삶.
너는 어떻냐고 물어 봤을 때, 나야 뭐.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냥 고시 보거나 꼴같잖은 학점 가지고 한 번 연봉 괜찮고 다달이 꼬박 몇 백씩 들어오는 삶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해. 우리는 동네 빵집에서 캄파뉴랑 바게트를 마치 소주를 마시는 것처럼 뜯었다. 그 친구를 데리고 이 영화를 본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