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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망자 Oct 01. 2024

'체인소맨'을 보고

창작품이 소비자에게 무언갈 남겨야 한다면



체인소맨을 거의 밤을 새워서 다 봤고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창작품이 소비자에게 반드시 무언갈 남겨야 한다면 뭐가 남아야 할까. 아니 반드시 무얼 남기는 것도 요새는 없는 것 같긴 하지만. 나는 따뜻함과 희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쩐지 그건 내가 사회적으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가며 브레인워싱 당한 것 같고(아무도 강요한 적 없음, 그냥 내가 스스로 뇌를 닦아버린 것) 정말 내 진심은 창작품이 지옥같은 끔찍한 경험을 남겨도 좋다는 생각이다. 체인소맨의 1부 결말은 생각보다 엄청 희망적이지만 도달 과정에서 보이는 절망감이 그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직장을 다니거나, 대학생활을 하거나,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하다못해 모임 플랫폼에서 사람을 만나더라도 위와 같은 상황은 벌어진다. 그 집단 안에서의 인간관계가 허울 뿐이거나 대단한 유대감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따뜻함'을 느낀다. 긴밀하게 서로를 내보이는 관계 뿐만이 아니라, 이렇듯 표면적인 왁자지껄함에도 인간은 얼마 간의 위안을 느끼니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다수의 소음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나는 이걸 지속성의 차이라고 본다. 함께 하고 있다는 기쁨, 욕구의 충족이 얼마나 나의 안정감을 채워주는가-)



어쨌든 이렇게 만났던 동료들이,




모조리 죽음을 당한다. 그것도 저렇게 모두 모여 술을 마시고 함께 여러가지 추억과 기억이 쌓인 바로 다음 날, 한 회차 만에 수없이 많은 캐릭터가 살해당한다.


창작물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캐릭터에게 공감과 호감, 반감과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많은 캐릭터가 함께 서로의 관계성을 두텁게 하면 할수록, 이 집단에 대한 애착이 늘어간다. 원피스는 그걸 매우 잘 알고 있는 작품이라, 항상 하나의 굵직한 에피소드가 끝나면 파티를 벌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 기쁨 속에서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작가가 그려놓은 기쁜 한 장면이, 독자들의 머리에 사진첩처럼 박혀 추억하게 되는 것이다.


근데 나는 이런 걸 비틀어놓는 서사의 변형이 참 마음에 든다. 실제 나의 삶에서 만화에 나오는 상실감과 절망감을 경험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만화 속에서 인물이 마음을 놓고 유대를 쌓아가면서 술한잔하고 내일봐~ 했는데 다들 이마에 총맞고 뒈져버린 장면들을 보면 이상하게 짜릿한 거다. 그렇다. 내가 새벽에 느낀 건 짜릿함이었다. 만화가 가끔씩 질리게 되는 건, 예상치 못한 흐름으로 전개되는 인생과는 달리, 수없이 많은 만화와 서사를 접하다보면, 이쯤 되면 이러한 '킥'이 나와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의 보편성 때인데, 후지모토 타츠키는 그걸, 그것도 생각보다 엄청 통쾌하고 암울하게 보여준다.


주술회전도 너무 재미있게 봤지만, 정말 빠져들어 하루만에 다 본 건 체인소맨이었다. 디그레이맨도 거의 중반까지는 그렇게 빠져있었던 것 같고, (이쯤되면 악마 소재에 뭔가 있는 걸까? 그러고보니 한 때는 열심히 악마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정리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는 소설에 쓰지 않을까 하면서. 그래서 영화 '유전'에서 애니가 자기 엄마 유품에서 악마 그림 책을 봤을 때 내가 그렇게 확 몰입했나보다. 악마는 인간의 욕망을 형상화한 존재라고도 표현되곤 하니.)

어쩌면 내가 요즘 정말 좋았던 인간관계에 대한 향수 혹은 아직까지 이어가고 있는 그런 관계를 유지해야한다는 강박이 곧 상실과 두려움이랑 연관되어서, 어떻게든 잡고 있으려고 하며, 거기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스트레스로 돌아온다는 걸 경험한다. 그럴때 난 가끔 '에라이 X발, 될대로 되어라-'라는 순간들을 맞이하는데, 이 만화가 조금 자기중심적이고 나르시시즘에 빠진 인간의 망상 같지만서도, 나의 관계를 맺고 끊음의 과정과 결론을 알아주고 있다는 듯한 개연성 없는 동일시,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요새 사람들이 읽고 감동받았어요~ 좋아요~ 보다 왜 이 인물은 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싶은 캐릭터나 글이 등장하는 작품이 좋다. 뭐,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플롯 트위스트에 대한 엄청난 열망에 빠지기 마련이다.



흔해빠진 설정이지만, 계약이라는 설정 역시 좋다. 악마는 언제나 계약을 원하고 그건 자본주의랑 꼭 닮았다. 리스크는 언제나 약자가 더 짊어져야하고 악마는 사실 엄청 큰 리스크는 없다(?). 인간이 있고 인간이 공포를 느끼면 악마는 다시 태어난다, 기억은 사라지지만. 기억을 잃고 자유가 억압되는 것도 무척 큰 리스크에 해당하기는 하겠지만 그건 인간 기준이다. 다만 인간은 물리적으로 눈알도 뽑히고 수명도 깎이고 몸뚱이 여기저기 다 악마에게 빼앗기기도 하는데, 어떨까. 기억을 잃고 자유를 억압받는다-와 시각과 후각 등의 감각이 사라지고 수명을 잃는다의 무게감은 어떻게 다를까. 후자는 굉장히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불편함들이겠지만, 전자는 오히려 성실히 살아온 인간들에게, 그리고 사람을 사랑했던 인간들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리스크일텐데. 그런데 악마는 인간의 감각이나 수명을 받아서 무얼할까? 모르겠다. 악마는 오히려 그런 상실감을 원천이자 주된 식사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인간이 있기에 악마가 있다는 어떤 과거의 인물의 말처럼, 상실감에 의해 더욱 발버둥치는 인간의 처절한 생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악마는 강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강해짐으로 인해 그 존재를 확인하는 삶.




체인소맨 속 악마들은 기본적으로 피를 선호하고(인간이 아닌 존재의 피라도) 인간을 죽이고 싶어하는데 그중 몇몇은 자기 충동을 제어하고 인간들과 함께 같은 악마를 사냥하러 다니곤 한다. 이게 그야말로 인간 같은 면이다. 아니, 인간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면모들이라 볼 수 있겠다. 인간에게는 절제가 미덕으로 받아들여지고 그게 인간 됨됨이라고 다들 말하고, 동시에 동물은 하지 않는, 동종을 적대하고 학대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유일한 생물이기도 하니까. 악마는 어쩌면 가장 인간 같은 면만 뽑아서 만든 정수인 걸 수도 있겠다. 아이러니하게 이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인데, 인간은 악마 같아야 인간 같고 인간 답다고 생각한다. (범죄자 옹호는 아니다. 살아가면서 여전히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나 가족들의 악마 같은 면들을 보지 않았나? 악마 같은 면이 다른 게 아니다. 그런 것은 무지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학습받은 무자비함에서 나올 수도 있는 거니까.) 


종교나 사회에서 강요하는 인간의 미덕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동물도 인간도 아닌 괴물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런 괴물은 성인으로 추앙받는 것 같고. 부처는 정말 근처 친구들 따돌림 한 번 안했을라나. 예수는 정말 태어나서 딸딸이 한 번 안쳤나? 이런 생각은 성인들을 나와 같은 하찮은 지위로 끌어내리려는 불쌍한 자의 열등감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따돌림 안 시키고 딸딸이 안 친다고 괴물이냐. 물론 다른 매체에서 악마랑 인간을 어떻게 그리는지는 정확히 통계를 내어본 적은 없으나, 적어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저 말이 대체로 잘 적용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을 그려내기 위해 만들어놓은 장치로서 기능해온지 악마는 오래되었으니까.





그런데 일본 만화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캐릭터 디자인에 대한 의문이다. 머리가 전기톱인 악마를 어떻게 사람들이 좋아하게 된 걸까? 그럼에도 왜 만화에서 메인 캐릭터는 항상 인기투표 1위가 되지 않는 걸까? 나루토나 덴지나 이타도리 유지 모두 다 열혈에, 바보 멍청이이고, 서브 남주보다 못생겼고 비교적 매력도 없다. 대책없이 천진난만하기나 하고. 사람들은 가끔 그런 놈들을 견딜 수 없어하는 순간이 있는 것 같다. 어린 아이는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하면서 가끔은 극렬한 혐오의 타겟이 되기도 한다. 어른들이 지켜왔던 질서와 이성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니까. 소년 만화는 '소년'이라는 것이 들어가있는 만큼, 아직 사회의 쓴맛과 아픔을 겪지 못한 채 천진하게 이상을 말하는 캐릭터가 등장하곤 하는데, 어라. 근데 잘 생각해보자. 나루터나 덴지, 유지가 정말 세상을 모르고 천진하기만 할까? 오히려 이들은 부모를 잃거나 학대를 당하거나 태어날 때부터 이능의 힘을 원치 않게 몸에 받아들여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배척당한 아픔을 겪지 않았나? 그럼에도 왜 천진할 수 있는 거지?


그게 바로 '현대의' 소년이 가져야할 미덕이니까.


주요인물 덴지는 체인소맨이 되기 전엔 그냥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불쌍한 미성년자 남성이었고, 기본적인 교육도 받을 기회가 없이 사채업자들한테 부모가 무참히 살해당해서, 욕망도 매슬로의 기본욕구 1단계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다. 성장서사는 당연히 영웅서사로 이어지는 만큼, 언제나 인물이 극복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가 열대어에 매달린 똥찌꺼기처럼 평생을 따라다녀야만 한다. 심지어 무언가를 극복하는 초반의 몇몇 순간은 자신만의 힘으로 극복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깃들어버린 빌런들을 이용하며 그 험한 세상을 거쳐가야하는데 그 빌런이 또 하필이면 세계관 최강에 해당한다. 체인소맨 악마, 구미호, 양면 스쿠나 등등.




이런 메인 캐릭터 옆에는 꼭 메인 캐릭터의 대척점에 서 있는 쿨계 검은머리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주술회전에는 메구미가 그렇고 나루토에는 사스케가 그렇고 체인소맨에서는 아키가 그렇다. (아키는 비록 브라콤이지만 그 디자인과 성격 때문인지 독자 인기투표에서는 항상 넘사벽의 득표율을 보여준다) 


이런 애들은 메인캐랑 같은 이성을 좋아하거나 해서 삼각관계가 되거나, 어쩐지 노력없이 성장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메인캐를 질투하며 악연을 맺지만, 결국에는 메인 캐릭터의 앞뒤 재지 않고 인생을 온몸으로 부딪쳐내는 행위에 감명 받고 일종의 유사 가족 관계 같은 걸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형제(특히 형)를 잃는 상황 설정이 되어 있고 항상 안타까운 과정 혹은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한 상실은 성장의 밑거름이지만 그 밑거름은 분노를 연료로 하며 움직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그저 밑바닥에서 살고 있던 메인캐는 너무 외롭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고독함으로 밀어넣는 서브남캐와는 달리 작은 것에서도 소중함을 느끼고 줄길 줄 알기 때문에 친화력이나 흡수력이 좋아 성장도 빠르다. 어느 정도 실력이 도마 위에 올라가 있지만 복수를 하는 데 있어 시간이 촉박하다고 느끼는 이 불쌍한 서브남캐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여캐나 자기를 아끼는 메인캐, 혹은 스승캐들을 돌아볼 여력이 없다. 결국 그들도 자기를 성가시게 하는 존재들을 사실은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고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거나,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죽음을 향해 뛰어가거나 한다.. 그 처연함이 사실 퍼먹기 좋은 것 같아서 그렇게 2차 창작이나 커플링이 마구 탄생한다. 적절한 시기에 서브 남캐는 자신의 육신을 산화시켜(;;), 메인 캐릭터의 경험치 반찬이 되어주기도 한다.

요즘 만화 소비층들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만화는 한국에서 언제나 메인 플랫폼이었던 적이 없고 일본발 소년 혹은 청년만화들은 특히 괴랄한 민족감정과 비만 혐오, 오타쿠 혐오, 여성 혐오와 엮여져서 음침한 욕망으로 비춰졌기 때문에, 내가 감히 생각하건대 만화 소비자들은 대부분 외롭고 우울하고 자극에 중독되어 있는 현대인들이다. 사회생활 잘해도 외롭고 혼자일 때가 편하지만 그래도 계속 외로움을 느껴서 사람이랑 어울리려 하고 다시 현타 쎄게 맞고서 트위터에 호소하는 나 같은 인간들도 많을 것이다.

어쨌든 이 만화는 여전히 빻았고 일본 남성 만화가들이 여자 가슴에 대해 품고 있는 별에별 망상들이 불편해서 그 짧은 새벽 시간에 '아 X발 그만 볼까-' 생각도 들었지만 많은 걸 생각하게 해 주었다. 특히 술쳐먹고 덴지 입에 토하고 미성년자인 덴지랑 섹스하려고까지 했던 아키의 버디, 히메노가 죽었을 때는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 부근에서 이 만화의 괴랄한 매력을 느꼈을 것 같은데. 위에서 언급한, 약간 왕좌의 게임 모먼트가 여기서 급작스럽게 나타나는 게  충격적이고 좋았다. 어쩐지 술자리를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면서 사실 그 술자리를 떠나고 나서 지금껏 연락을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만화에서처럼 모두 머리에 총을 맞고 내 내면 세계에서 퇴장해버린 느낌이다. 왜 내가 그 장면에서 관계에 대한 생각을 강렬하게 떠올렸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마음 주고 사랑주고 있는 현재의 모든 관계에 대한 불안감이 여기서 해소된 것 같아서 그런 것 같다. 내가 그렇다고 이런 걸 원하나? 그렇지는 않고 그냥 관계라는 게, 그렇게 매듭 짓고 다음 일을 생각할 수 있는 식의 일들이 아니니까 계속 스트레스를 받을 걸 알고 그 속에서도 엄청난 행복을 받을 걸 알지만 어쩐지 어리석게도 그걸 대체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가끔씩은 그냥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특히 사랑. 덴지가 마키마에게 느낀 게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늑대소년처럼 자라온, 가슴에 미친 일남들을 투영한 캐릭터를 통해 사랑을 논하는 것도 싫지만, 어쨌든 서사에서도, 표면상으로도 마음을 준 사람이 나를 개처럼 대하고 개처럼 다뤄진다는 것에 흥분과 애정을 느끼는 것도 다 이해되고 그것도 하나의 애정 형태라고 느껴지고 가끔 나도 그렇게 취급받고 싶어질 때가 있다. 상대방은 너무 대단한 사람이고 나는 그에 비해 동등한 위치에 서 있지 못하고, 아니 오히려 내가 동등하게 취급받는 것이 불편하고 부당하다고 생각되어서 내가 스스로 배를 까고 나를 그냥 개처럼 다뤄줘- 라고 애원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덴지가 보여준 행태를 나는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근데 그 모든 기반은 결국 이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고 관심을 조금 넘어서 나에게 애정이 있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그 감당할 수 없는 기쁨에 있는 것인데 결국 그것도 너무 장렬하고 비참하게 체인소맨에서 깨진다. 덴지는 결국 마키마를 잘라서 마키마의 살덩이를 직접 씹어서 먹게 된다. 스토리상 그렇게 해야 마키마가 부활하지 않을 거란 설정이 있지만 오, 나는 그게 너무 과격하고 인간이 해선 안 될 일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음에도 이런 결말이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다. 분노를 통한 복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얄팍한 설명이지 않을까.


애정은 뒤틀린 형태로 나타날 때, 매력적이다.

물론 이 매력이라는 것을 '지향'한다는 것은 아니다. 매력은 어디까지나 매력일 뿐, 사람을 종국에는 파멸시킬 위험이 있는 것 역시 매력이다. 매력은 죽음의 공포와도 비슷해서, 주이상스를 느끼는 그 순간 인간은 죽어버리듯, 그 매력은 매력의 아름다움까지 가닿기 위한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그 크기를 기하급수적으로 키우고 우리가 그 순간을 맛본 다음에는 이 세상에서 경험해 본 적 없는 절망을 선사해준다. 우리가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도록.



먹어야만 되는 이유가 있었을까? 악마인 그를 먹고 나서야 괜찮아지는 것들? 주술회전의 유지도 스쿠나를 먹고 계속 자신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실제로 유지의 얼굴을 한 채로 나타나니까) 스쿠나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자신의 일부로 만든다는 것, 결국 그런 악마의 성향과 성격까지도 나의 일부로 만든다는 것으로 나는 생각되는데, 구미호와 나루토, 스쿠나와 유지와는 다르게 덴지에게 마키마는 애정관계에 있었고 유대도 있었고 거의 사랑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건 앞선 관계들과는 너무 다른 것들. 앞선 이들에게 구미호나 스쿠나는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고 그걸 정복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일종의 마지막 보스와 같은 느낌이어서, 성장서사에 엄청 적합했는데, 마키마는? 


정복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극복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덴지는 그냥 마키마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면 행복할 수 있었다. 마키마가 친구들을 죽이지만 않았다면. 사실 구미호나 스쿠나에 대응되는 건, 형태적으로 봤을 때 덴지에게 포치타에 가까웠겠지만 둘은 계약을 한 관계니까 또 다르다. 이런 비대칭적인 관계들 속에서 어쩐지 체인소맨의 특이점이 더 크게 와닿는 것 같다. 계약자들과 그저 계약만 한 사람들은 오래도록 힘을 지속할 수 없고 결국 악마, 자기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쏙 빼닮은 두려운 존재와 감정적으로 유대를 맺고 함께 했을 때 힘을 더 지속할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마키마는 그런 것이 필요했던 악마였고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식은 공포를 통한 숭배 혹은 적대감이었던 것. 그니까 마키마도 계약을 하고 인간이랑 놀았으면 되는데 너무 세다 보니까 계약조차 할 수 없어서 그냥 인간인 척 한 거다. 사실상 제일 불쌍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먹는 다는 행위 자체는 사실 방식 그 자체가 뭐 어디 신화에서 가져올 수 있는, 괜찮은 해석의 툴이 있겠지만 오히려 그걸 요리하고 맛을 보는 장면 자체는 그 해석의 툴로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이것 자체가 플롯 트위스트라고 여겨진다. 2부를 살펴보면 덴지가 성장하고 새롭게 덴지 앞에 나타난 마키마와 동종의 어린 악마에게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만드는 시발점이라는 면을 강조하기 위해 넣은 장치가 아닐까 생각된다. 

1부는 어쨌든 즐길만큼 즐겼고 충분히 만족했다. 

아직 2부를 하나도 보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파워도 살리고 새로운 마키마도 어떻게 잘 키워보고 하겠지. 이 쓸쓸한 분위기만큼은 유지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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