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용주의와 당장주의에 대한 비판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모두가 이야기를 논할 순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사회화 과정을 거쳐 가면서 우리는 한 번쯤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 '굉장히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이야기'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가능하다. 지식인과 일반인의 차이는, 이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별로 진중한 생각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렇게 중후한 무게의 의미를 가지는 키워드에 대해 논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 보면 호기심 넘치는 하나의 가십거리처럼 얘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유하는 것에 대한 나의 정체성과 진심을 하나의 가십거리로써 이야기할 때, 인문학도적 역량을 발휘하고자, 또는 인문학도가 되고자 하는 열정적인 이들의 기분은 언짢을 수밖에 없다. 슬라보이 지제크(슬로베니아 출생 철학자)는 오늘날의 위험이란 교묘히 섞인 실용주의적 행동주의라고 주장했다. 가령, "오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굶주리고... 우리는 멍청한 철학적 토의에 시간을 쓰고... 뭐라도 좀 해라!" 이런 외침을 우리는 항상 듣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문구들 속에 불길한 명령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차린다. 그것은 "그냥 해! 많이 생각하지 말고"와 같은 명령이다. 즉 그저 흘려보내듯 가십거리로서 얘기하고 보내면 되는 건데, 왜 굳이 불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면서도, 현실에 충실히 하지 않는다는 편협한 시각으로써 우리를 바라본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그들'이란 '우리'와 같은 사유 체계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중한 생각에 대해 폄하하고 우리를 편견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일컫는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날카로운 시선에 대해 내가 하고자 하는 비판은 다음과 같다.
-1) 비판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첫 번째, 우리는 그 누구보다 주체로서 살고 있다. 우리는 사유 체제에 대한 냉소로부터 자학적인 자기 희화화를 하는 수동적 회의주의자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로서 사유 체제를 더욱 나은 방향으로 하고자 끊임없이 사색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분주해 보이지 않고, 사치스러운 여유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육체적 영역에서의 객관적 입장일 뿐이다. 다음으로, 그들이 말하는 현실 인생은 과연 '실재'하는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의미와 상징이 부여된 사유 체제(ex-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민주주의, 돈이 곧 권력을 의미하는 자본주의 등)에서 의미와 상징(ex- 종이 쪼가리에 의미를 부여해 돈의 가치를 만들어 놓은 것 등)만을 좇는 주체가 남이 이러한 이념에 대해 회의와 사유를 진행하고 있음에 대해 냉소하는 것은, 다시 말해 선조가 고안해낸 사유 체제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사유 체제의 나은 방향성을 고안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는 모순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가히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도 못하면서 남의 삶을 냉소하는가? 그다음으로,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현실'이라고 믿는 그 사유 체제에서 조종당하듯 '객체'로서 안타깝고 안쓰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가히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그들'을 생각은 할 수 있지만 생각하지 않는 이들. 즉 하나의 노예 또는 짐승으로서 판단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타당하고 탁월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념과 의미, 상징에 대하여 그저 가십거리처럼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이미 가장 적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벌은 그들을 사유 체제에 종속된 허구의 주체, 즉 그 체계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비판하는 능력은 상실해버린 하나의 노예로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2) 우리 모두 그들이 될 수 있음을 주의하라
나는 가끔 내 측근들에게 글을 공유해보는 경험을 한다. 내가 글을 공유할 때 이들의 반응은 대체로 "나도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와 같은 주저리주저리 설명함이 다반사다. 이 이면엔 자신도 그러한 합리적인 판단과 사유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구차한 변명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글로 정리하지 않고 객관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유가 아닌 생각의 산책일 뿐이다. 유흥적인 그 무엇일 뿐이지, 체제와 행동의 근본이 되는 '사유'가 될 수 없다. 이것이 내가 '사유'를 '가십거리'로서 이야기하고 말하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의 비난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팽배한 부조리한 분위기, 눈치 보는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그들'이라고 생각된다. 대한민국 사회는 '철학'에 관해 굉장히 무지한 실례를 범한다. 이는 내가 자세히 다루지 않아도 알 것이다. 가령 독자 당신은 유럽인들에게 묻는 철학의 키워드와 한국인들에게 묻는 철학의 키워드에 대해 긍/부정의 방향은 역방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유럽에 이상주의적인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다. 사실 어느 문화권에서나 공통적으로 편견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사람이 통례적 근시안으로 자기의 이웃 사람을 유용한 사람과 해로운 사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아무런 주저 없이 재빨리 구분 짓기 일쑤이기에 이러한 일들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적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특히 사유의 가치를 경시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가끔 '그들'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특히 가장 '그들'이 되기 쉬운 대한민국 사회에서 우린 두 눈을 똑바로 뜬 채로 우리의 정체성을 추구해야만 한다. 남들에게 편견을 갖고 감히 폄하를 저지른다면 '그들'과 같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와 같은 생각이 가장 이상적인 우리의 귀결점이겠지만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당신에게 사회와 제도적 차원에서의 노력을 바라는 것은 너무 늦다. 또한 통시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의 역사 중 사회적 차원에서의 노력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노력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나는 개인적 대안으로 '위험한 사람 되기'를 제안한다.
도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에선, 사유할 능력 없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능력 없음, 말할 능력 없음이 결국 악을 키운다고 보았다.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자신이 결코 유대인 혐오자도 아니었고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고 강변했다. 그의 죄는 단지 체제 순응적 복종에서 나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위험한 사람'은 체제 순응적이지 않으며,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갖추고, 옳고 그른 것에 대해 당당하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사색의 시간을 가지고 탁월한 판단으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근본적인 사유 능력'을 위해서 독서와 글쓰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행동은 '사색'을 유발하고 우리에게 '사유'를 갖추게 한다. 우리는 항상 그들이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 저마다의 자기 도달 과정인 인생에 대하여 탁월성을 발휘하기 위해선 우리의 뿌리 깊은 동물적 본능을 버리고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인간적 열망을 불사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