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수필

by 리단쓰

창밖에는 아이들의 부산함이 있다. 겨울 날씨치고는 무척이나 따스한 탓인지, 아니면 방학을 즐기는 탓인지 아이들의 왁자지껼은 끊이지 않는다.


‘그래 방학이 있으니 좋겠구나’ 새삼스레 아이들의 방학이 부러워지는 것은 그들이 꾸릴 수 있는 ‘추억 만들기’에 대한 부러움이 컸기 때문일 게다. 새삼 요즘 아이들에게 방학 동안의 추억이란 눈썰매장, 스키장, 아니면 교육적 효과가 있는 ‘박물관 견학’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생각에 안쓰러워진다. 물질적 풍요에 이미 익숙해진 그들은 이런 안쓰러움이 오히려 이상한 일로 보일 테니 나도 역시 구세대의 한편을 차지하려나보다 생각해 본다.


초등학교 시절 겨울방학은 유난히 길게 느껴지고 근질근질거려 엄마와의 전쟁을 치르곤 하였다. 그때의 겨울 방학은 3학년을 마친 겨울 방학이라는 기억이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뒤늦게 태어난 우리 집 막내가 엄마 뱃속에서 세상구경을 하기 위해 꼼지락거리던 때가 바로 그 시절이라는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어느 방학 때보다도 만삭의 몸으로 아이들 셋을 뒤치다꺼리하시기에 버거우셨는지 엄마는 오빠와 나 그리고 여동생을 몽땅 시골 할머니댁에 보냈다 시골 큰집의 행사는 거의 어른들의 참석으로 마무리되었기에 어린 우리끼리 간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떠났던 그 시절의 겨울방학은 ‘추억 만들기’에 너무도 충분한 사건이 많았던 것 같다.


가끔씩 서울에 오셨을 적에도 유난히 아들 사랑이 심하신 할머니의 눈총을 알아챘지만 시골집에 도착한 저녁시간에 오빠만 유난스레 챙기시는 할머니가 낯선 시골집의 정경만큼 어린 마음에 긴장감을 주었다. 그래도 새로운 환경 속에 볼거리는 무진장 많았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촌들의 얼굴은 마냥 반가운 일이었다. 과자나 사탕 같은 군것질이야 생각조차 못하던 시골 살림이지만 아이들이 먹어 치우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고구마가 있었기에 넉넉한 마음이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눈치가 없기도 했다. 시골살림이야 뻔한 것이었고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큰집 식구들도 적지 않은 대식구였으니 매 끼니마다 식량에 아이들이 드나들며 날것으로 먹어치우고 구워 먹고 삶아 먹은 고구마의 양은 엄청났을 것이다. 서울 손님 대접에 마냥 후할 수밖에 없는 틈을 타서 사촌들까지 덩달아 포식을

했으니 유난히 아들에 대한 선호가 심하셨던 할머니의 언짢음이 새삼 이해된다. 가끔 서울에 오시면 엄마가 딸들에게도 똑같이 계란프라이를 해준다고 한 마디씩을 꼭 하시던 분이셨으니 여자아이들이 무섭게 먹어대는 간식을 곱게만 보시지는 않은 터였다.


그러던 어느 평화로운 날, 눈물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시골반찬이야 뻔한 것이어서 이름조차 모르던 몇 가지나물류와 그만그만한 찌개들, 그리고 쌀을 아끼기 위해 해 먹던 ‘무시밥’- 그 이름도 아련하지만 무를 전라도 사투리로 무시라고 한다며 사촌이 가르쳐준 기억이 난다- 의 서걱함으로 맞던 밥상이 거의 매일 상차림이었다. 서울에서야 엄마와 아버지만 드시는 걸로 알았던 ‘청국장’의 맛을 안게 바로 그해 겨울방학, 시골집에서였다. 이틀이 멀다 하고 상에 오르는 청국장을 안 먹고는 미 끈덕거리기도 하고 서걱 이기도 하는 무시밥을 넘길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작정 청국장 국물을 떠다가 밥에 비벼서 한 끼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것이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더니 그 짝이 되어버렸다. 고리고리하면서도 구수한 그 맛을 어린 입맛에도 느끼게 되어 밥이 아쉬웠다. 그날은 점심을 밥으로 먹었고 친구를 만나러 나갔던 사촌오빠가 없었기에

우리 서러운 딸들은 마음껏 포식을 하였다. 다른 반찬이 없어도 무를 넣어 끓인 청국장의 커다란 양푼이 마냥 배부르게 하였다 먹어도 먹어도 배는 고팠고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동갑이지만 생일이 빠른 사촌언니, 나 여동생은 양푼에 조금 남아있는 청국장을 마저 치운다는 생각으로 부뚜막에 따뜻하게 담아놓은 사촌오빠의 밥그릇을 넘보고 말았다. 아마 그 주동자는 내가 아니었나 싶다. 사촌이야 남녀의 서열에 이미 주눅 들어 있었고 세 살 밑의 여동생이 나서기에는 어린 나이였기에 아무래도 마음이야 똑같았더라도 그 밥을 날름 내온 것은 나밖에 없을 터였다. 신나게 배 두드리면서 건넌방에 들어가 키득거리며 놀고 있을 때 뒤늦게 귀가한 오빠의 점심상 차리는 소리가 들렸고 벼락같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 좋은 사촌오빠는 어린 동생들이 주눅 들까 봐 배고프지 않다고 하건만 할머니는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시고는 다짜고짜 작대기를 드셨다. 물론 그 매는 억울한 사촌언니가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 나는 그 정도의 간접적인 폭력을 눈치챌 수 있기에 할머니도 오빠도 미워지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상해버린 나는 당장 서울에 가겠다고 울며불며 난리를 쳤고 이미 화가 나신 할머니는 “계집애가 웬 성질이 저리 드세다냐 겁 모르게 키워놔서 저렇지” 하시며 눈을 더 크게 뜨셨다. 어쨌든 그날 저녁 난 옆집에 먼 친척뻘 되시는 분이 볼일로 서울행 막차를 탄다는 소식에 서울 데려가라며 그 집에서 꼼짝을 안 했고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일상의 평화를 찾았던 것이다. 그 일로 시골 동네에서 아무개 큰딸은 고집쟁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런 추억을 매단 채로 나의 시간은 많이도 흘렀고 대학 1학년때 큰 아버지 1주기로 가게 된 시골 큰집에는 아들을 앞세우고 속앓이를 하시던 할머니마저 떠나신 후였다. 큰아버지 1주기인데도 할머니의 부재가 크게 다가오며 어린 시절 자의식이 강해 울퉁불퉁했던 손녀딸을 바라보시는 할머니의 커다란 눈이 느껴졌다. 그리고 결혼한 후 직접 장보기와 식탁을 전담하면서 허름한 시장 한편에서 찐빵 크기만 한 된장덩이를 보게 되었다. 얼마나 도회지의 삶에

무덤덤하게 살았는지 난 그게 ‘청국장’ 이란걸 몰랐다. 그냥 된장을 조금씩 담아서 먹음직스럽게 파줄기를 한가닥 넣어 포장한 것으로 알았으니 어설픈 주부였다.

검은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인 할머니가 청국장이라고 일러주며 팔았을 때 난 그걸 추억으로 사보았는지도 모른다. 찐빵크기만 한 청국장에 물을 어느 정도 맞추는지도 가늠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뚝배기에 개어서 끓이다 부르르 넘쳐나는 봉변을 당하고 나니 남는 것은 뚝배기겉에 지저분한 건더기와 허멀건한 국물과 두부 조각뿐이었다. 그렇게 상에 올려진 청국장을 그래도 남편은 구수하다며 맛나게 먹을 때 난 혹시 남편도 청국장에 얽힌 추억이 있나 물어보면서 내 지난 시간을 들먹였다. 청국장을 보면 그렇게 된다.

그 맛보다는 어린 시절 방학 때 맞은 사건이 떠오른다 얼마 전 시골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사건 제공자인 사촌 오빠가 그의 가족과 함께 서울에 왔었다. 저녁 식탁에서 가족끼리 그날 일이 오르내렸고 마음 좋은 사촌오빠는 빙긋이 웃으며 할머니의 사랑을 이야기했다. 올케언니는 자기 남편이 집안에서대접받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던지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할머니에 대한 원망보다는 그리움에 이야기를 꺼낸 것이니 청국장은 언제나 할머니에 대한 작은 추억으로 구수함을 지킬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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