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여섯 편의 단편들로 구성된 ' 여수의 사랑'은 한강 작가의 저력이 시작되는 출발선상의 작품이라는 생각에 감탄스럽다. 작가의 20대에 연속적으로 써 내려간 인간의 아픔과 트라우마를 세밀하게 다루는 시작점인 것이다.
조숙하고 신중한 세계관과 가치관의 표출이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올 때 놀라움보다는 납득이 되는 마음이었다.
인간의 근본적인 탐구와 응시 관철을 늘 놓치지 않는 한강작가의 작품들은 모두 소중하게 느껴진다.
80년대 청춘시대를 지낸듯한 조숙함에 가끔씩 한강 작가의 나이를 상기시켜 보게 된다. 이미 13살 어린 나이에 광주학살의 처참한 사진들 속에 무조건적인 두려움과 회피대신에 통찰과 응시를 감당한 저력이 계속되는 작품 속에 제대로 관통되니 독자는 감사할 뿐이다.
등단작인 붉은 닻의 완성도에서 놀랍고 그즈음 글발이 활활 불타오르며 엄청난 필력으로 탄생시킨 작품집이기에 연관성과 연속성을 제대로 느끼며 독서를 할 수 있었다. 1995년도 기점으로 여수의 사랑을 내놓고 20년 뒤에 소년이 온다가 세상에 나오고 30년 뒤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궤적을 보인다니 역시 대단한 저력으로 우리 시대를 지켜주는 작가이다.
스치듯 아파하는 사람들마다의 고통에 함께하는 한강 작가의 삶의 태도는 늘 감동과 감탄이 남는다.
사람들 고통과 각인된 기억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아마도 가족의 상처나 상실일테니 그 부분의 집요한 탐색은 아프지만 또 안심이 되는 위로가 남는다.
자흔이 떠난 뒤의 나흘 동안 나는 한 번도 책장과 창틀의 먼지를 닦지 않았다. p63. 여수의 사랑
집이 자신에게 필요 없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p125. 어둠의 사육제
아랫목에서 본 얼굴 때문에 나는 줄곧 혼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p170. 야간열차
진규를 묻은 뒤 의붓아버지는 진규가 죽은 자리에 있었던 동네 아이들의 집을 찾아다녔다. 두려움에 주눅이 든 부모들은 의붓아버지에게 사과 조의 부의금을 두둑이 챙겨주었다. p215. 질주
황 씨는 매일 아침 자신이 파내어버린 캄캄한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었으며 울음을 터뜨린 다음날이면 나무 한 그루를 불살랐다. p247. 진달래 능선
마치 그 수많은 운명들이 소리 없이 해안으로 밀려드는 것 같았다. p300. 붉은 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