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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빈 Feb 05. 2021

도망가자, 그리고 다시 돌아오자

며칠 밤을 꼬박 새워서 낸 서류가 떨어졌다. 머리가 아팠다. 이 기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핸드폰에 고이 잠들어있던 고속버스 앱을 켰다.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한적한 곳을 찾아 뒤적거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강원도의 한 마을. 도착하자마자 바다로, 정확히 말하면 바다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요즘 빠진 라거 맥주 하나와 꼬북칩을 사서 터덜터덜 파도 앞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바닷가에는 나 하나였다. 멍하니 조용한 바다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는 그런 아련한 장면을 상상했는데 이놈의 바닷바람은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에어팟 옆으로 칼바람이 윙윙대고, 맥주는 여기저기 흘러 머리와 옷을 적셨다. 어떻게든 버텨보겠다고 용쓰며 앉아있다 보니 사색이고 뭐고 이러다 입 돌아가겠다 싶었다.


추위를 녹이려고 아까 지나친 조그마한 물회집에 들어갔다. 평소 같으면 잘 들어가지 않았을 그런 식당이지만 나름 도망쳐왔으니 색다른 걸 시도해보고 싶었다. 드르륵 문을 여니 삼삼오오 모여 식사하고 계시는 주인아주머니와 친구분들. 눈이 마주치니 아주머니가 놀란 눈으로 아가씨 혼자냐고 물으셨다. 그 뒤로는 서빙되는 반찬과 함께 쏟아지는 질문. 사람들은 혼자 놀러 가서 밥도 잘 먹고 새로운 사람과 말도 섞으면서 잘만 다니던데 나만 이렇게 버거운 걸까. 엄마뻘 아주머니들의 뜨거운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급하게 식당을 나섰다.



오는 길 버스에서 급하게 잡은 조그마한 숙소에 도착했다. 부부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였는데 평일 예약 손님이 나와 모녀뿐이라 4인 도미토리를 혼자 쓰게 된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널찍한 방에 짐을 풀고 1층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침대에 누워 다시 노래를 재생했다.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말자

그 다음에 돌아오자 씩씩하게 지쳐도 돼 내가 안아줄게’



가만히 노래에 귀 기울이다 보니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나는 왜 도망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걸까. 멋지게 바다를 보며 사색하는 것, 맘 편히 혼밥하는 것이 이리도 어려울까. 왜 인생은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 걸까. 정말 잘할 자신 있는데 왜 서류를 보고 내가 궁금하지 않았을까. 여러 마음이 뒤죽박죽돼서 눈물로 섞여 나왔고, 한 번 터진 눈물은 쉽사리 그치기 어려웠다. 이렇게 꺽꺽대며 울어본 게 얼마 만인가. 눈물은 어쩐지 패배의 상징인 것 같아 어느 순간부터 눈물이 날 것 같으면 마음을 꾹꾹 누른 뒤 꿀꺽 삼켰는데, 그렇게 모인 그간의 눈물이 한 번에 터진 느낌이었다.



한참 뒤 다시 바닷가에 나갔다. 밤바다는 낮과는 다르게 바람이 잦아들어 고요했다. 깜깜해진 바다는 무엇이든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한바탕 울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마음 다스리기가 사실은 힘듦에 대한 회피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불안한 마음을 마주하면 더 불안해지니깐 어두운 마음을 다 뒤로 숨겨버렸다. 그리곤 다 괜찮아진 줄 알았다.


이렇게 오롯이 바다를 바라본 적이 얼마나 있을까. 친구와의 여행에선 호들갑을 떨며 인생샷을 찍고 풍경을 담기에 급급하지 않았나. 도망쳐온 바다를 가만 보고 있으니 마침내 마음 한편이 바람에 뻥 뚫려 시원해지고 그 자리엔 다시 버텨볼 힘이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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