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 구석에서 돌아가는 선풍기를 가만히 보고 있다보니, 그동안 내가 지나온 수많은 여름날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에어컨을 키려는 나에게 아직 에어컨을 틀 때가 아니라며 선풍기로 더위를 달래주던 엄마의 모습과, 잔뜩 상기된 얼굴로 선풍기 바람을 코앞에서 쐬고 있던 초등학교 시절의 내 모습, 친구들과 피구 경기를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교실 천장에 달린 선풍기를 키던 중학교 시절의 내 모습까지, 내가 보내온 여름날의 기억들이 전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어린 시절 나에게 여름은 그저 피하고 싶은 계절에 불과했다. 여름은 언제나 눅눅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고, 어딜 가든 불쾌한 냄새가 나는 계절로 강하게 각인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여름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여름은 변함없이 덥고 습하지만, 그 습한 열기로부터 오는 불쾌감만큼이나 여름만이 주는 낭만과 행복감 또한 만만치 않게 크다는 것을 점점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외출 후 집에 돌아와 선풍기 바람을 쐬며 먹는 시원한 수박, 습한 여름밤의 공기를 맞으며 걷는 한강의 분위기,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 잠결에 들려오는 선풍기 소리...이제 이 모든 것들이 낭만으로 다가온다.
얼마전, 친구의 블로그에서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여름이 백 번도 안된다’는 문구를 봤다. 이상하게도 이 문구가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이 문장을 메모장에 옮겨 적어두었다. 우리에게 남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고작 몇십 번 남짓이라니,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 사실이 문득 낯설고 아련하게 다가왔다. 나는 원래 여름을 ‘버틴다‘고 표현할 만큼 여름을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여름을 견뎌내기 보다, 숨겨진 낭만과 행복들을 찾아 누리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은 나에게 낭만을 찾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오랫동안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온 것 같다. 멈추는 것을 두려워했고, 여유를 가지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잠시 멈추어 주변을 둘러보는 것과 삶의 사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일상을 다채롭게 해주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여름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