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VP

by neveres

찬바람이 나나 싶더니 어느덧 연말이 다가온다.


달력의 계절이 돌아왔다.


은행을 퇴직하고 연말이 다가오자 나는 이제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력을 달라고 닦달당할 일이 없어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렇다. 해마다 연말이면 은행 창구는 달력 때문에 전쟁통이 따로 없었다. 적어도 5년 전까지는 그랬다.


은행 달력을 걸어 놓으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 때문인지 특별히 예쁘지도 않은 그놈의 달력을 내놓으라고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 들어서 창구 업무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거 좀 나눠 주는 게 무슨 일이랴마는 문제는 수량이 무척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은행에서 달력을 무제한으로 찍어서 나눠주는 것이 아니다. 은행은 자선단체도 아니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돈을 사고파는 곳인데 사람들은 광고에 나오는 ‘동반자’ ‘이웃’의 이미지를 기억한다.


각설하고.


은행 각 지점에서 경비를 써서 달력을 본점에서 구입해 배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심 쓰듯이 대량으로 배포할 수도 그럴 이유도 없다.


어차피 달력을 주고 싶은 건 그 지점에 이윤을 주는 손님들이고(대부분 그런 이들은 달력을 찾지도 않지만) 길 가던 아무나 가 아니다. 은행은 각 지점이 실적을 평가받는 구조여서 엄밀히 각자 살림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해당 지점 통장 거래하는지 확인해 보고 달력을 나눠주는 것이다.


ㅇ타벅스에서는 그 비싼 커피를 더 비싼 시즌 음료까지 합쳐서 17잔을 마셔야 달력 하나를 주는데도 닥치고 부지런히 e-프리퀀시를 찍어 대면서 은행 창구에서는 왜 까닭 없이 뭘 달라는 말을 그렇게 위풍당당하게들 하는지 모를 일이다.


내 이전 세대에 달력 인심이 워낙 좋았나 보다 생각해 볼 뿐 은행에 다녀도 집에 은행 달력을 걸지 않았던 나로 써는 이해 불가였다. 내가 길 가다가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나도 사은품 하나 달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싶었다.


그냥 좋게 달라고 하면 있으면 주고 없으면 못주고 그럼 그만 일 텐데 언성을 높이고 삿대질은 기본이고 숨겨놓고 안 준다고 몰아 새우니 공황장애 올 판이었다.


뒤에 달력이 보일 수는 있는데 없다는 말은 ‘너’ 줄게 없다는 말이다. 가끔 업체 가져갈 달력을 자리에 쌓아놓고 욕 먹이는 책임자들이 있었다.



이쯤에서 오늘의 주인공 등장이다.


달력의 계절이 다가온 어느 날 달력 배포가 어느 정도 끝이나 소요가 좀 진정되었나 싶었는데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1번 창구에 느닷없이 번호표도 뽑지 않고 웬 아줌마가 냉큼 앉자마자.


“달력 줘요!”


하고 대뜸 직원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손님 죄송합니다. 저희 달력이 다 소진되어서 배포가 끝났습니다.”


하자

“아 그러지 말고 달력 달라니까!”


하면서 이제 숫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 제일 고참 행원이었고 가장 안쪽 창구에 앉아있던 나는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애들은 보호해야지 싶어서..... 아무리 다 같은 행원이어도 선배는 선배가 아닌가.


그런데 그 순간


“아 나 이 은행 MVP야! 그러니 달력 받을 자격이 있어!”


맙소사!


정말 내가 가져가려고 챙겨놓은 달력이 있으면 냉큼 주고 싶었다. 누가 뭐래도 이 손님은 그날의 MVP였으니까!


잔뜩 긴장되어 있던 창구는 순간 웃참 챌린지에 실패한 직원들과 손님들의 쿡쿡거리는 소리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아마도 자신을 VIP라고 말하고 싶었을 그 손님은 그저 길 가던 누군가였지만 아직도 달력의 계절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그녀가 생각난다. 그래도 상당히 큰 웃음을 선사해 주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달력을 주지 못해 미안했던 기억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은행 달력을 마르고 닳게 걸어놨어도 은행 VIP가 돼서 지점장이 직접 달력 들고 찾아다니는 부자가 못되었으면 포기하자.


차라리 종교를 가지시라. 교회, 절, 성당 어디든 한 군데만 가도 달력은 공짜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