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적금

by neveres

때는 2020년 12월 중순, 퇴직신청하고 남은 휴가를 소진 중이던 어느 날 정오가 조금 못되어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는 안 받는 편인데 전화번호 뒷자리가 은행 같아서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ㅇㅇㅇ 대리님 이 시죠?”


젠장..... 아니나 다를까 은행이다.


“네 맞는데요.”


“아 네! 저 OO지점 O차장입니다~쉬고 계시는데 죄송해요.”


아... 뭘까..... 내가 업무처리해 준 고객이 뭔가 잘못돼서 다른 지점 가서 민원을 넣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대리님 혹시... 12월 9일 날 거래내역서 발급해 주신 OOO손님 기억하세요?”


아....


“네 차장님 기억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러시나요?”


“대리님~지금 그 손님이 저희 지점에 오셨는데 도대체 가질 않으세요 그날 대체 어떻게 보내셨어요?”


“경찰 부른다고 하니까 가시던데요.”


“아 대리님 저희는 정말 경찰을 불렀는데도 안 가세요.”


오죽했으면 사표 내고 집에 있는 사람한테 전화를 다 했을까... 하면서도 도와줄 방법은 없었고


나는 문득 그날의 기억을 소환해 보았다.




12월 9일, 9시를 조금 넘긴 시간... 첫 손님이 들어와서 정면에 대기 의자에 앉았다. 중년의 남자와 할머니 한분이었다.


부동산 중개인과 임대인인가? 아니면 상속업무를 보러 온 걸까? 몇 가지 예측을 해보며 호번을 했다.


띵동!

“1번 손님!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바삐 내 자리로 온 두 사람 중 아저씨가 나에게 목에 걸고 있던 신분증을 빠르게 보여줬다.



아저씨 : OOO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나왔습니다. 이분이 저희한테 민원상담을 받으러 오셨는데....(옆에 할머니를 보시며) 저 말씀하세요


할머니가 가방에서 서류를 한 무더기 꺼내놓기 시작했고 아저씨는 이때부터 핸드폰만 보기 시작했다.


할머니: 내가 OO은행에서 적금 든 게 있는데 거래 내역 좀 뽑아줘요. 두 개였는데(울먹이며) OO저축은행에서요... 그게 다 없어져 가지고 내가 힘들게 모은 돈이에요 흑흑


할머니는 울먹이다 화를 내고 하시면서 온통 엉망진창으로 하소연을 하기 시작하셨다.


자... 일단 할머니는 적금을 들었고 그 돈이 사라졌으니 찾아달란 얘기고 은행이름을 오락가락하시니 적금이 존재했나부터 확인하고 거래내역 뽑아드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조회결과 1990년대에 적금 가입하신 건 확인되었으나 너무 오래전이라 거래내역 보존기한이 지나서 내역서는 뽑아줄 수가 없었다.


적금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면...


찾아갔다는 얘기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적금 안 찾아갔다고 은행에서 떼먹진 않는다. 칼국수를 좋아하시던 어느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탓에 예적금은 죄다 본인 명의로 들고 본인 확인하고 찾아줘야 했으니 남이 찾아갔을 리도 만무하다.



이때 옆자리 직원에게서 메신저가 왔다.


‘대리님! 출근하다 보니 매주 수요일 이 동네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뭐 지역주민 상담 같은 거 해준다고 현수막 걸어놨던데 거길 찾아갔던 모양이에요.’


아하... 뭔가.... 저 옛날 고을 관아에 억울한 백성이 찾아가서 하소연하는 뭐 그런 건가? 국회의원도 참 할 짓이 아니 구나 이런 얘길 들어줘야 한다니....



할머니께 상황 설명을 시도하였으나 역시나 받아들여질 리가 만무했다.



울고불고 소리치고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은행에서 돈을 다른 사람한테 줬는지 어쨌는지 없어졌다는 얘기만 무한 반복이다. 그리고 자꾸 무슨 저축은행이라고 하시는데 할머니가 적금 든 은행은 통합이전 내가 근무했던 A은행이고 거기는 계열사로 저축은행이 없었다.


함부로 판단해버리고 싶지는 안지만 이쯤 해서 할머니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했다.


국회의원사무실에서 뭐 하시는 분인지 모를 그 아저씨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시면서


“몰라서 따라 온건 아니에요.”라고 했다


정신 이상한 거 알고도 할 수 없이 왔다는 이야기인가 보다.


한참 난리를 치고 책임자 한 명이 쫓아나가고 같이 온 아저씨가 자기 바쁘다며 할머니를 채근해서 나갔다.


설마..... 그게 끝이 아닐 줄이야.


같은 날 오후 3시 50분경. 할머니는 혼자 다시 오셨다.


대기 중인 대여섯 명의 손님을 무시한 채 내 자리에 바로 와서 앉으셨고 다시 오전과 같은 이야기를 무한반복하며 울고불 고를 시전 하셨다.



억지로 나에게 금감원에 민원 넣었던 서류를 내밀면서.....


금감원 답변은 정리해 보면 은행은 해당 거래내역 보존의무기한이 지나서 제공할 의무가 없고 당사자가 거래 은행을 명확히 알지 못해서 다른 행명의 저축은행을 언급하는 등.... 불라불라... 뭐 대충 금감원에서 준 서류 내용은 할머니가 제정신이 아니시란 소리였다.



나는 달랠 마음도 참을 인내심도 다 사라졌다. 이러다 내가 미칠 판이다.



그 당시 퇴직신청일이 확정 전이었지만 통상 12월 중순이니 사표 던질 날도 이제 일이 주 남짓이던 상황에서 민원이 무서울 것도 없었다.


안 그래도 유난히 개판인 동네, 진상이 수시로 출몰하고 경찰이 수없이 오고 객장에서 수갑 채워 체포하는 지점... 여기 이 할머니까지 보탤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정말 너무 하시네요. 아까 저희 차장님이 잘 설명해서 보내드렸잖아요. 말씀대로 은행이 타인에게 적금을 지급했다면 경찰에 신고하시지 왜 안 하세요?”


할머니가 어버버 하시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신고할 거야”


하셨다.


“네 신고하세요 저희도 업무방해로 신고하겠습니다. 경찰 부를 께요!”


내가 전화를 들자 할머니는 눈물도 안 나시는데 곡을 하시며 “내가 적금을 들었는데...”를 다시 시작하셨고 나는 폭발했다.


지점장실로 갔는데 외근 중이신지 지점장님은 안 계시고 다시 돌아와서 할머니한테 정말 어떻게 아침저녁으로 은행에 와서 이러실 수가 있냐고 화를 내며 전화수화기를 들고 112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가만히 지켜만 보던 부장이 후다닥 나가서 할머니께..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얼른 일어나세요!”


하니까 거짓말처럼 할머니가 스르르 일어나 가셨다.


평소 노인분들과 꽤 잘 지내는 편이고 창구가 혼잡하지 않으면 사는 얘기도 많이 들어 드리곤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은행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명확히 선을 긋지 않으면 직원이 먼저 정신이 나갈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마음에 병이 드셔서 그러신 거란 건 알지만 앞으로 몇십 년을 더 다녀야 할지 모를 어린 직원들이나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중년의 직원들도 다 마음에 병은 있다.


어쩌면 더 심각한지도 모른다.


그렇게 할머니를 보내고 정확히 일주일 후에 명퇴공문이 떴고 나는 17년 11개월을 근무한 은행을 그만뒀다.


이 할머니 때문에 그만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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