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불안 불안하다 했다.
기어코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다.
“아 왜 자꾸 신분증을 달라고 해! 내가 맞는데!!!!!!!!!!!!”
아이고 주여.....
조금 전까지 내 앞에 업무 처리 중인 손님 뒤로 서성이던 영감님이 조바심 내는 기색을 보여서 안 그래도 불안하던 차에 그새를 못 기다리고 다른 창구로 가서 앉더니 예상했던 대로 사단이 나고야 말았다.
직원 : 서명 통장이라 본인 확인해야 예금 인출해 드릴 수 있어요! 신분증 주세요!
이미 그 창구 직원도 열이 오를 때까지 올라있었다.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안 그래도 이 지점이 오지 중에 오지임을 체감 중인데 아침부터 웬 영감님이 “내가 나인데 왜 나를 확인하려 드느냐!”며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유명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넘버 가사처럼 “나는 나!”를 호기롭게 외치고 계신 것이다.
나는 앞에 있던 손님 업무를 불이 나게 마무리하고 소란이 벌어진 창구로 부랴부랴 뛰어갔다.
나: 아이고 아버님! 왜 그새를 못 기다리시고 여기 와서 이러셔~ 제자리로 가세요~ 네!? 얼른 가시자고요. 제가 처리해 드릴게요.
영감님: 아니! 저! 왜 자꾸 신분증을 달라고 하냐고!!! 내가 맞는데!
나: 아 저는 알지~저야 우리 아버님이 ㅇㅇㅇ아버님인 거 알지만 이 직원은 이번에 새로 와서 처음 뵙는데 어떻게 아버님이 누구신지 알아요! 그러지 말고 제자리로 가시자고요. 제가 금~방 처리해 드릴게요. 우리 아버님 인출? 인출하러 오셨구나~ 제가 얼른 해드릴게요. 빨리 오세요.
하..... 자식도 낳아 얼러본 적이 없는데, 내가 80 먹은 남의 집 노인네를 어르고 달랠일인가 싶지만 일단 자리로 모시고 갔다. 그리고 예금 인출을 해드리며 다짐을 해두었다.
나: 아버님. 신분증 내라마라 하는 소리 듣기 싫으시잖아요. 그럼 번호표 뽑으시고 차례 돼서 제자리에 손님이 있거든 좀 기다리셔서 차례 지나쳐 가도, 제 창구에 간다고 청경한테 말씀하시면 제가 앞에 손님 가시는 대로 다른 손님 안 부르고 아버님 업무 처리 해드린다고. 몇 번을 저한테 오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네!? 다른 창구 가서 언짢아하지 마시고 제창구로 오시는거에요? 아셨죠?
수없는 이 다짐은 허무하게 허공을 떠도는 메아리, 의미 없는 약속이었다. 지나고 나면 또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처음 보는 직원 창구에 갔다가 ‘신분증’ 이야기가 떨어지기 무섭게 사자후를 날리시는 것이다.
정작 우리 시‘아버님’은 세상없는 양반이신데 은행에서 만난 이 ‘아버님’은 날이면 날마다 남의 집 자식들에게 이 난리다.
이 어르신이 통장은 신식(?)으로 서명으로 만드시고 인출은 구식(?)으로 본인확인 없이 해달라고 매번 이런 식으로 직원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이러실 바에야 통장을 도장으로 바꾸시라고 해도 곧 죽어도 서명통장을 유지하시면서 본인확인은 죽어도 해주기 싫다고 하니 환장할 노릇이랄 밖에.
뻔히 며칠에 한번 보는 직원들이야 별 말없이 인출해 드리고 말일이지만 처음 본 직원은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본인확인은 은행업무 처리에 기본 중에 기본이다.
그리고 안면이 있는 직원들도 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다고 변경해 드려야 한다던가 통장이나 카드를 분실하셨을 때는 신분증을 스캔해서 제신고서에 이미지를 첨부해야 하니 신분증을 요구해야 했다. 이럴 때는 정말 아기 달래듯이 어르고 달래고 겁주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야 간신히 신분증을 얻어(?) 낼 수 있었다.
나도 첫 만남에서는 신분증을 달라고 해서 서로 얼굴을 붉혔던 적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분증 달라고 할 일이 거의 없어지니 내 앞에 앉아서 업무처리를 할 때는 또 세상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말씀도 선선하게 잘하신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 영감님께 신분증이 ‘발작버튼’(아버님 죄송해요.)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정말이지 신분증을 내밀어 자신을 확인받는 절차를 그렇게나 서운해하셨다.
평생 거래한 은행에서 자신을 매번 확인받아야 하는 것이 못내 서운하고 분했던 거라고 짐작할밖에 다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지막 지점에서 만난 이 영감님이 내 자리를 새로 채웠을(충원이 되었다면) 직원과 또 대판 하신 건 아닐는지, 고마웠던 손님들도 기억나지만 이런 손님은 눈에 밟힌다. 딱히 나쁜 분은 아니었는데.
은행원은 당신의 그 무엇도 궁금하지 않다.
신분증도 본인확인도 그 모든 절차가 다 ‘필요’에 의한 것이다. 제발 부탁이니 달라면 주고 물어보면 답하시라.
묻기도 따지기도 싫기로는 당신 앞에 그 은행원이 백배는 더 한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