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브런치 북의 첫 번째가 될 책은 브런치 북 제목에 가장 부합하는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이다.
나는 7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당연히 그때부터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성경을 부분적으로 읽어왔다.
유초등부 3박 4일 여름 수련회에서 열정이 불타오르는 전도사님 덕분에 수련회 기간 내내 성경책을 읽다가 밤늦도록 전도사님의 우레와 같은 목청에 힘입어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있다. 온종일 성경을 읽으라고 해서 코를 박고 읽었지만 그때 읽은 내용은 한 줄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중, 고등학교는 동네에 있는 미션 스쿨을 다녔었다.
학교에서 포켓 성경 같은 걸 줘서 일주일에 한 번 채플 시간마다 강당에 그 성경을 들고 갔던 것 같은데 교목 선생님의 설교는 그 넓은 강당에서 잘 들리지도 않았던 까닭에(지금처럼 자막이나 영상을 틀어주지도 않았다.) 지루한 마음에 성경을 읽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책은 읽다가 걸리면 얻어맞을 테니 오직 볼 거라고는 손에 든 포켓 성경뿐이었다.
그렇다.
내 중고등학교 시절은 심지어 학교에서 예배시간에도 뺨을 맞던 시절이다. 존다고 때리고 딴짓한다고 때리고 잡담한다고 때리고 다른 볼거리를 들고 와서 들춰봐도 때렸다. 손에 들고 있던 성경으로도 아이들을 패곤 했다.
그런 예배가 아이들에게 무슨 은혜가 되었겠는가. 심지어 그 학교 교사 대부분이(아마도 전부가) 교인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여튼,
나는 채플 시간에 딱히 은혜도 안 되는 설교는 귀에 들리지도 않고 무료한 마음에 성경을 읽었다. 그때 읽던 성경은 주로 ‘아가서’(로맨스, 멜로)와 ‘요한계시록’(호러, 판타지, 서스펜스)이었다. 이렇게라도 성경을 읽게 하신 우리 주님의 뜻이 있었겠지만 나의 선택지는 그나마 오감만족을 시켜주는 덜 지루한 성경을 골라 본 것 일뿐 저 시절 말씀보다 은혜받은 기억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질풍노도의 망나니로 살았던 대학교 시절을 지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던져졌을 때 나는 돌아온 탕자처럼 성경을 가져다 사무실에서 간간히 발췌독을 하였다.
그때 사무실 모니터에 부적(?)처럼 붙여 놓았던 것이 잠언 24:16~20 말씀이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 느니라.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 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말씀 구절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때 나는 누군가를 악인으로 규정하고 나를 핍박받는 의인의 위치에 놓고 말씀을 붙잡고 ‘승리’하게 해달라고 ‘악인’을 쓰러뜨려 주시고 벌주시라고 기도했었다. 정작 내가 의인이 아닌데 말이다.
물론 상대가 ‘악인’의 범주에 차고 넘치게 어울리는 인물이긴 했었다. 하지만 살다 보니 그런 인간들은 직장에서 없으면 심심한 존재들이다.
그 시절을 지나 시간이 또 흘러 재정의 문제에 걸려 넘어졌을 때 안 하던 십일조를 드리며 붙잡았던 구절은 말라기 3:10이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나의 의도와 바램은 분명했다. 재정의 위기를 넘어서 내가 도저히 불가능한 이 십일조를 내는 것을 통해 넘치는 물질의 복을 받으리라. 성경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이 자신을 시험해 보라 하시는 구절이 아닌가! 십원 한 장이 아쉬운 사람이 내일의 일확천금을 꿈꾸면서 주머니를 털어 로또를 사는 심정으로 십일조를 바치고 저 구절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내 소득의 십의 일조를 주님 것으로 인정하고 그분께 드리는 거룩한 순종이 아닌 돈 주고 돈 먹기, 일종의 투자 개념으로의 십일조 생활이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바로 재정의 문제를 해결하여 내가 잘못된 기복신앙의 길로 가지 않도록 오래도록 단련하셨고 지금 주님께 드려지는 물질에 대해 나는 의도와 요구가 없다. 나는 이것이 너무 감사하다.
이렇듯, 오랜 시간 나는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인 나의 관계와 나의 무언가를 내어주고 더 큰 것을 받는 비즈니스 관계로써의 주님과 나의 관계 사이를 정신없이 오갔다. 대부분 후자가 더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시절, 나는 성경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부분만 발췌해서 그 구절만 붙잡고 살았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으로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나에게 말씀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였다.
그리고 삶의 많은 소용돌이를 거쳐 첫 직장이었던 은행을 그만두고 비로써 나는 온전히 성경을 통독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주님을 알고 인격적으로 그분을 만나가기 시작했다. 할렐루야!
상황만 놓고 보면 좋은 직장을 그만 두어 실직 상태이고 코로나 시국이어서 안 그래도 건강이슈가 있던 나에게 불안한 상황이었으며 부채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시절 교회에서 온 교인이 다 함께 했던 통독과 신구약 통독 강의에 참여하며 눈에 보이는 상황은 비루하나 내 삶은 달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매일 아침 출근해서 오래된 나의 성경을 펼쳐 근무 시간 시작 전까지 하루에 단 한 장이라도 말씀을 본다. 물론 창세기부터 차례로 빠짐없이.
예전에는 그저 이래서 복 받고 저래서 복 받았다는 스토리만 읽혔던 구약의 많은 인물들의 다른 이 면이 보였다. 그들의 연약함, 형편없는 인성 등 약점이 많은 그들이 보였고 굴곡진 그들의 인생이 보였다.
신약의 사도들에게도 인간적이고 때때로 허당이며 엉뚱한 면들을 보게 되었다. 스스로를 ‘주님이 사랑하는 자’라고 하는 요한과 그런 요한의 순교 여부(?)를 묻는 단순하고 열정이 과한 베드로가 정겨웠다. 그런 베드로에게 “그걸 니가 알아서 뭐 하냐”는 취지로 말씀하시는 예수님도 한결 가깝게 느껴졌다. 더 이상 4 복음서가 단지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 아닌 위에서 아래에서 옆에서 뒤에서 사방에서 예수님을 조명하는 다채로운 이야기로 읽혔다.
그렇게 나는, 그래서, 그런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주님이, 이런 나를 만나 주시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부족하고 내가 연약하기에 주님의 일에 써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기에 단연코 처음 시작은 성경이어야 했다.
전적으로 압도적인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