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
나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임과 동시에 선과 악 중 악을 더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원죄에 대한 생각은 나의 종교적인 신념에 기인한 것이려니와 인간의 내면에 악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은 살면서 쌓여온 학습의 결과다.
정말 요만한 어린아이도 자기 것을 빼앗기면 빽빽 울고 동생이 더 예쁨을 받으면 거침없이 꼬집고 할퀴고 때린다. 본인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물건을 집어던지고 화를 낸다.
그 어린아이가 성장한 성인은 어떠한가. 본인의 소유에 대한 집착과 더 가지려는 욕심, 욕구를 채우려는 본능은 더 커지고 그 행위는 더 악해지며 이기심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 돈과 권력에 대한 숭배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덕목(?)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다소 고리타분하게 들릴 이야기지만.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매 순간 선하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악은 타고난 것이지만 선은 이렇듯 누군가의 선택과 책임, 희생,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 이야기하려는 ‘나의 사랑하는 책’은 이러한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몬스터>는 주인공 닥터 덴마의 선하고 올바른 선택과 그로 인해 그가 치르는 대가와 희생의 여정을 그린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그 선택이 자신을 더 곤경에 빠뜨리고 힘든 길을 가게 한다 해도, 때로 생명의 위협 앞에 선다 해도 결국은 옳은 선택을 하고야 마는 이 비현실적인 주인공 닥터 덴마의 쫓고 쫓기는 힘겨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납득하고야 말 것이다.
그는 출세를 꿈꾸고 적당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와 타협하기도 했던 우리들 중 누군가였지만 그저 자신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혹은 단순히 그것이 ‘옳은 일’ 이어서 자신의 이전 삶과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대단한 정치적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숭고한 가치를 지키려고 나선 것도 아니며 세상을 구할 ‘영웅’이 되려는 것도 아닌 이 남자.
‘평범한 사람’이란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매 순간의 이 어려운 선택을 하는 것이 ‘평범한 우리’, ‘평범하고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며 힘들지만 누군가, 더 많은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본성이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누군가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말하는 ‘선’의 의미에 부합하는 보여지는 요소를 모두 가진 남자.
외모가 아름답고 모두가 호감을 갖게 하는 말투와 행동, 비상한 두뇌를 가진 이 남자.
요한. 아니 ‘이름 없는 아이’ 혹은 ‘이름을 빼앗긴 아이’.
누군가의 광기와 욕망으로 만들어진 ‘실험’의 ‘창조물’. 한없이 약하고 악한 인간이 만들어낸 ‘완벽한 창조물’이 바로 요한과 니나. 이 아름다운 쌍둥이였다.
그래서 그중 한 아이는 이름을 지우고 살인을 하고 기억을 조작한다.
오직 세상에 그 아름답고 완벽한 존재, 쌍둥이만 남을 때까지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아니 결국 그가 지우려고 한 것은 그 자신이었을까.
자신의 부모가 부모이기 이전부터 모든 것은 계획되었고 그래서 자신 안에 ‘괴물’이 만들어졌으니 이 복수와 증오는 정당하다.
닥터 덴마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도 그가 자신을 살려 냈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얼굴의 완벽한 청년에게는 이 세상 모두가 자신의 분신인 쌍둥이를 제외하고 복수의 대상이거나 재미로 밟아 죽일 수 있는 개미떼 같은 존재일 뿐이다.
모든 선하고 좋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는 ‘절대악’을 택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의 전부였을까.
그 실험이, ‘붉은 장미 저택’의 그 비극이, 이름을 빼앗긴 쌍둥이 중 한 명의 손을 놓아버린 엄마가. 511 킨더하임의 끔찍한 인간 개조가... 모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진실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실험의 대상으로 ‘설계’된 만남이었지만 쌍둥이의 부모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 모든 비극을 시작했던 보나파르츠 역시 쌍둥이의 엄마를 사랑했고 그래서 쌍둥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래서 ‘붉은 장미 저택’의 비극이 생겨났다.
딸 혹은 아들의 손을 놓았던 엄마는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아이들의 아버지를 사랑했듯이 아이들을 사랑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지만 도망치려 했던 것도 그녀의 진실이었다.
511 킨더하임에서 자란 모든 아이가 ‘괴물’이 되지는 않았다. 웃음과 눈물을 빼앗기고도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남은 아이도 있었다. 자신은 평범한 삶을 빼앗겼지만 누군가는 소중한 일상을 보낼 수 있는 삶을 살게 해 주기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던진다.
쌍둥이에게 끔찍한 기억이 실제 했듯이 그들에게 진심으로 손을 내민 이들도 존재했다.
그 손을 잡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쌍둥이 여동생 니나처럼. 정작 ‘붉은 장미의 저택’에 끌려갔던 그녀처럼. 엄마가 둘 중 놓아버린 하나의 손. 그 손의 주인인 그녀처럼 말이다.
모든 비극을 잊고 “인간이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너희는 괴물이 돼서는 안 될 보석”이라는 말을 마음에 담았던 그녀처럼.
자신을 받아준 양부모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을 주었던 그녀처럼.
혹은 511 킨더하임의 또 다른 생존자처럼.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 모두를 희생하고 떠난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이들에게 또 모든 상황 속에서 어렵지만 옳은 선택을 했던 ‘닥터 덴마’처럼.
이 작품의 말미에 우리는 ‘몬스터’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함께 남겨질 것이다.
그것은 나일수도 당신일 수도 우리일 수도 있는 인간 안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악한 본성’이다. 내 안의 증오와 미움, 욕심과 질투,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낸 본성에 가까운 드러나기 쉽고 편한 존재.
하지만 우리는 어렵고 힘든 선택을 하는 쪽을 택할 수 있다. 어쩌면 당연하고 그래야 함이 마땅한,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유익이 되는 선택, 무언가를 살리고 지키는 선택. 지극히 ‘평범’한 ‘올바름’. 우리는 그 편을 택할 수 있다.
<몬스터>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믿음, 소망, 사랑’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을 선택했다. 이 작품의 팬들은 이게 무슨 깨는 소리냐고 야유하겠지만…
이 어둡고 쓸쓸한 스토리 안에서 서로를 믿고 폐허와 파괴 속에서 소망을 가지며 오늘 전부를 잃어도 다시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이 작품이 그런 이야기이기를 바래본다.
이렇게 긴 소개 따위가 무색한 명작. 오래도록 ‘나의 사랑하는 책’...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 되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