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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lee Aug 21. 2023

멋진 신세계

Sci-Fi X Dystopia

가끔 사는 게 좀 귀찮을 때는 거저먹고 싶은 생각이 피어오른다. 일을 안 하고 돈을 벌고 싶다, 공부 안 하고 똑똑해지고 싶다, 관리 안 하고 잘생겨지고 싶다 등의 생각. 물론 그런 일이 가능하지는 않다. 도둑놈 심보가 잘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 '도둑놈 심보'가 옳은 말이 된다면 어떨까. 더 나아가 이 거저먹으려는 생각이 보편적인 도덕이며,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루려는 행위 자체가 우습고 한심한 행위가 된다면? 그리고 단순히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모든 사람이 노력 따위 하나도 안 해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구조와 기술이 뒷받침된다면? 이쯤 되면 뭔가 틀리다고 생각은 해도 슬슬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멋진 신세계>가 제시하는 디스토피아다. 디스토피아는 무엇일까? 


디스토피아에 대해 아주 간단하고 명쾌하게 설명한 말이 있다. 범죄자가 아닌데 감옥에 가면 디스토피아, 범죄자가 감옥에 가지 않을 때가 아포칼립스물. 그러니까 디스토피아란, 인간이 만든 사회 구조가 인간의 목을 조르는 모습을 보고 쓰는 말이다. <1984>, <우리들>, <동물농장>, <멋진 신세계>, 현대에 와서는 <헝거 게임>, <설국열차> 등의 작품이 있고, 보면 알겠지만 아주 많이 나온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작 중 인물들이 맞서는 부조리한 사회 구조가 현실의 무언가와 닮아 있다. 그래서 모든 디스토피아물은 사회비판적이다. 현재 사회의 문제점을 과장하거나 변형해서 작 중 배경을 만드는 만큼, 배경은 미래 거나 가상의 세계, 어찌 되었던 지금 여기는 아니다. 지금 현재를 배경으로 디스토피아물을 만들면, 그건 사회 비판물, 고발물이라고 불리지 디스토피아물은 아니다. 디스토피아의 장르적 쾌감 중 하나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집어내어 비틀고 짜깁기해 만든, 기묘하게 우리 세상과 비슷하면서 불쾌한 세상을 관람하는 재미이고, 현대 사회에선 그런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디스토피아물은 그 어떤 장르보다 배경이 중요하다. 배경이 단지 등장인물의 행동 무대가 아니라, 작품의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검열과 우민화를 비판하는 소설 <1984>의 배경은 신어 (Newspeak)를 통한 언어의 검열과 이중사고를 통한 우민화 정책을 실시하는 국가다. 그렇다면 멋진 신세계는 어떤 설정을 가지고 사회의 어떤 부분을 비판할까? 그리고 이게 도둑놈 심보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책의 표지의 시험관 아기들과 알약들은 이 소설의 설정의 중추가 되는 두 가지 기술을 나타내고 있다.

<멋진 신세계>는 쾌락형 디스토피아의 효시답게 수많은 참신한 설정을 창조했지만 그 핵심적인 설정은 두 가지다. 소마. 그리고 인간 생산. 소마는 무한한 행복을 만들어내는 약이다. 이 약 하나만으로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도덕과 상식은 모조리 무너진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좋은 가정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봐라. 아무런 고생도 노력도 조건도 없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두 번째는 인간 생산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정확하게 필요한 만큼. 완벽한 조건을 갖춘 상태로. 즉 행복해서 노력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경쟁과 계급이란 요소도 없어졌다. 이 세상에서 알파 계급들은 키도 크고 잘생겼고, 똑똑하며 고위직이지만, 그 이유는 그들이 노력해서도, 고생해서도 아니다. 그저 그런 사람이 필요해서 생산했을 뿐. 역으로 키 작고 멍청한 사람들 역시 필요해서 생산된다. 당연히 계급 간 차별도 없으며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하다. 애초에 모든 계급에 소마가 동등하게 배급되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쯤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계급이 정해지고, 계급에 상관없이 무조건 행복할 수 있다고? 그런데... 이 책이 파고드는 금기가 바로 이것이다. 왜 이렇게 살면 안 되는가? 왜 처음부터 행복하게 생산되어서 약으로 쾌락을 누리는 게 잘못되었지? 이런 도둑놈 심보가 상식이 되고 현실이 되는 사회는... 어쩌면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더 행복해지기 위해 고생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도 있으니까. 맛있는 음식을 사기 위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학위를 얻기 위해 지겨운 논문을 쓰고, 그런 소소한 것들. 그리고 지난 수십 세기 동안 인류의 목표는 하나였다. 고생은 줄이고 행복을 늘리는 것. <멋진 신세계>의 사회에서, 이것은 이미 완료되었다. 이 책이 디스토피아 중에서도 SF 스럽게 과학 기술에 따른 인류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류의 과학, 그리고 기술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 멋진 신세계는 그 극단이다.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기술들은 <동물농장>, <1984>, <우리들> 같은 다른 디스토피아 고전들보다 더 줄거리와 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기술로 인간의 삶을 무한히 행복하게 만들었을 때, 그때 인간에겐 무엇이 남는가? 인류의 모든 위대한 업적은 우리의 삶에서 고통을 제거하고 행복을 만들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소마와 인간 생산, 무한한 욕망의 충족 속의  <멋진 신세계>는 낙원처럼 보이는가?  이 책이 비판하고자 하는 사회의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인류는  <멋진 신세계> 속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큰 행복, 더 적은 고생만을 위해 평생 달려 나가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다. 그 목표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목적도 발전도 없이, 그저 살기 위해 인간을 생산하고 인간을 생산하기 위해 살아가는 세상. 


이 책의 주인공 존이 말하는 데로, 인간이 진정 가치를 찾는 것은 행복이 아닌 고통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멋진 신세계>의 세상은 진짜 낙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실의 고통 따위에 의미는 없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그저 신 포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서 그럴듯하다는 사람은 있어도, 디스토피아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이 대다수라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행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결국 무한한 행복 끝에 도착한 것은 약과 성관계로 찬 윈시시대로 의 회귀였고, 진정한 인간성과 무한한 가능성,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멋진 신세계> 속 사람들, 그리고 현실의 우리가 경멸하는 고통과 결핍 속에 존재한다. 이 세상에 객관적인 행복과 욕망의 양은 있어도, 객관적인 가치는 없으니 말이다. <멋진 신세계>를 원하지 않고 불행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만의 특징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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