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9월 5일
8월 24일 오전 다섯 시 삼십 분 알람을 듣고 일어나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한다. 도시락 통에 딱 맞는 토스트 두 장과 계란 두 개를 구워 통에 넣는다. 물을 넣은 텀블러와 귤 두 개도 챙긴다. 자질구레한 것들을 넣은 에코백과 어제 미리 챙겨놓은 수영복과 비치타월이 들어있는 피크닉 가방을 챙겨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와 미리 빌려둔 차에 탄다. 구식 모닝이다. 오래된 차 특유의 불친절한 블루투스 연결 방식으로 핸드폰과 차를 연결하고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는다. 제주 제주시 아라1동 387. 대중교통으로는 두 시간 이십 분, 자가용으로는 35분가량이 뜨기에 어젯밤 우리의 제주여행 예산에 과분한 렌트를 했다. 시내를 벗어나고 육 차선 도로가 사 차선, 사 차선 도로가 이차선이 되고 건물 대신에 나무가, 그리고 숲이 나타난다. 숲에는 아직 나무 사이에 숨어 햇빛을 피하지 않은 안개가 있다. 고개를 오르내릴 때마다 안개가 진해졌다가 옅어진다. 얕은 비도 오다가 말다가를 반복한다. 시선의 끝이 안개에 가로막힌다.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방향의 차들은 안갯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고 사라진다. 서귀포 방향으로 가는 차는 꽤 있는 반면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차들은 거의 없다. 나는 비상 깜빡이를 켜고, 백미러로 뒤에서 차가 오는지 수시로 확인한다. 얼마 전, 뒤에서 통제력을 잃은 거대한 화물차가 들이박는 사고의 영상을 본 탓이다. 이런 안갯속에서 그런 화물차를 만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지만 언제나처럼 내 생각은 일방향 비극으로 향하고 돌아오지 않는다. 도로가 점점 구불구불해지다가 곡선이 지나치다 싶을 때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안내말이 핸드폰, 아니 구식 모닝의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가장 먼저 보이는 절의 큰 건물 앞 주차장에 차를 댄다. 시간은 오전 7시 언저리, 우리를 제외한 차는 없다. 아니, 입구 근처에 시동이 켜진 파란색 트럭을 제외하고는 없다. 우리처럼 절을 보러 온 분위기가 풍기지는 않는다. 차에서 아침에 챙긴 토스트와 귤과 물로 허기를 약간 달래고, 지도로 절의 배치를 확인한다.
이곳에 오고자 한 이유는 새벽의 고요한 절을 보고 싶은 것, 그리고 미륵불과 불상들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 오르막을 올라가 지장전, 대웅전, 삼성각을 지나 옅은 안개가 깔린 미륵불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황금색 미륵불은 안개에 가려 희미하게 빛난다. 뒤쪽의 수많은 불상들 또한 안개에 잠겨 있다. 미륵대불의 왼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여 절의 가장 안쪽부터 보자 마음먹고 그곳으로 올라간다. 목재 현판에 150m를 걸어가면 나한전이 나온다고 적혀있다. 올라가는 길이 꽤 숨찬 데다가 비는 오지 않을 듯하여 돌아오는 길에 챙겨 오자며 길 도중에 우산을 두고 다시 걸어간다. 양쪽으로는 굵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존재해 내리막 건너의 절은 금세 보이지 않게 된다. 오르막길을 조금 더 오르고 나서야 나온 나한전의 문은 닫혀있다. 작은 새의 사냥을 성공한 살모사가 우리에게 모습을 들키자 얕은 돌담을 넘어가려고 애를 쓰지만 여의치 않자 뱀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다. 뱀이 놀라지 않게 살며시 그것을 지나가 닫힌 문을 빼꼼히 열어 자유로운 자세의 16 나한을 보고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길, 뱀은 그 자리 그대로 멈춘 채 아주 조금씩 새를 삼켜가고 있다. 올라왔던 길을 내려가자 안개가 더욱 짙어져 저 멀리 절의 지붕은 시야에 드러났다가 사라짐을 반복한다. 관음사는 4.3 사건 당시 전소되었다. 아마도 같이 전소되었을 절터의 나무들은 다시 자라 나한전으로의 계단 중간에 자리잡기도, 대웅전 옆에 자리잡기도 하여 꽤 높고 두껍게 자라났다. 절의 기단과 계단은 재에서 다시 자라난 나무들 주변으로 넉넉하게 자리를 비켜주고 자리를 잡아 낡아간다. 그때의 불꽃을 기억하지 못하는 미륵대불과 대웅전 사이에 자리 잡은 커다란 나무는 넉넉한 자리를 여유롭게 쓰며 대웅전보다 훨씬 높이 자라난다.
미륵대불이 모셔진 단에서 내려오자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불교에 무지해 인터넷으로 찾아보며 인사를 드린다. 문수보살은 사자를,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타고 있다. 산신, 칠성, 독성을 봉안한 삼성각,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전을 차례로 살펴보고 인사를 드린다. 나는 종교는 없지만 운명은 믿는 편이고, 믿음은 없지만 예의는 차리는 편이기에 신을 보면 여러모로 존경받는 사람을 뵌다고 생각하며 인사를 드린다. 안녕하십니까, 혹은 안녕하십시오의 정도로. 대웅전 지붕에는 나무 홀씨가 자리를 잡아 조그만 나무가 자라고 있다. 저 나무는 대웅전 지붕에 우연히 날아오는 빈약한 흙과 영양소를 양분 삼아 어느 정도 자라났다가 사그라들 것이다.
올라온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내려가자 절의 입구가 나온다. 차를 대어둔 곳은 입구가 아니었다.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이 새겨진 사천왕문과 기둥이 일(一) 자로 되어있는 일주문을 지나 입구로 나와 불상들을 관찰한다. 불상에는 시주자들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다. 서울시 도봉구, 서울시 강남구 등 익숙하고 생소한 주소지도 눈에 띈다. 차를 대어둔 곳으로 가니 배가 아주아주 고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sd카드 정리를 잘 못 한 것인지 관음사에서 찍은 사진은 전부 사라졌다. 신기하게 그 이전과 이후의 사진들은 온전히 남아있는 게 혹시 귀신이 곡을 해버린 건지 아니면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지 않고 사진을 찍어댄 탓일지도 모르겠다. 여자친구의 카메라에는 다행히 사진이 온전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