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 <달과 6펜스>를 읽고
무언가에 몰두하고 열정적이었던 과거와 달리, 현실과 타협한 자신을 다시금 마주할 때만큼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적이 또 없다. 책을 읽는 매분, 매초마다 내가 초라하게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는 주변의 시선이나 현실의 생계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그림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데에만 몰두하는 찰스 스트릭랜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런 감정을 극대화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독자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책의 하이라이트는 안락하고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스스로 내던지고, 초라한 행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찰스 스트릭랜드를 나무라는 인물에게 그가 그림을 그려야만 함을 설토하는 장면이다. 스트릭랜드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며,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는 문제가 아니지 않냐고 소리친다. 빠져 죽지 않으려면 헤엄 실력과 상관없이 우선 물에서 헤어 나오는 것이 중요하듯, 그림에 빠져버린 자신의 그림 실력과는 상관없이 우선 자신은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스트릭랜드는 6펜스로 비유되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고 꿈꾸는 달을 좇는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스트릭랜드는 달 이외의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달보다는 6펜스에 가까운 곳에 서 있는 독자는 달을 좇는 스트릭랜드를 보며 대리만족감과 자괴감을 동시에 느낀다. 누구나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만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미래의 안락한 삶을 포기할 용기 정도는 지녀야 비로소 가능하다. 생계를 유지하고 가정을 꾸리기에 바쁜 현대인이 스트릭랜드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이 때문에 한때 가슴에 불꽃을 품었던 사람들은 달을 좇는 스트릭랜드의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스트릭랜드와 자신의 영혼의 맑기 차이가 좁힐 수 없는 수준으로 벌어졌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한때 불꽃을 품었으나 지금 6펜스에 서 있는 사람들은 언젠가 한 번 현실과, 또 스스로와 타협하는 순간을 겪으며 영혼에 한 번 금을 낸 이들이다.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6펜스를 선택한 사람은, 달을 선택해 마치 시야를 가린 경주마처럼 달려 나가는, 맑은 영혼을 가진 인물을 볼 때마다 초라함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 스트릭랜드는 독자에게 대리만족감과 자괴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스트릭랜드가 독자에게 대리만족감과 자괴감만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스트릭랜드의 더 큰 역할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풍요롭게 하고 싶다는 욕구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시간적 여유가 주어진다고 해도, 즉 6펜스가 주어지더라도 달을 좇을 수 없다. 애초에 그들에겐 달이 없기 때문이다. 하고 싶고 좇고 싶은 것이 있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 때문에 달을 저편에 밀어두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몰두할 달이 없다. 이는 자신만의 달을 탐색할 충분한 시간과 여건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달을 찾지도 못하고 오로지 6펜스에만 집중했던 독자는 스트릭랜드를 보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달을 좇는 것이 자신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알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 역시 스트릭랜드처럼 몰두할 달을 찾아 나선다. 스스로를 탐구할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의미를 지닌다.
『달과 6펜스』는 이처럼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른 목소리는 과감히 내던진 채 자신이 원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인물을 통해 독자에게 카타르시스와 박탈감, 그리고 부러움과 닮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한다. 이는 결국 독자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한다. 독자는 삶을 대하는 스트릭랜드의 태도를 보며 잊었던 달의 가치와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던 삶의 가치관을 정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