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날 뭘 믿고 환불해주나요?
[일상(日常)의 인상(印象)] 연재를 시작합니다.
스쳐 지나가는 일상 속에서, 생각할 거리가 있는 순간을 기록합니다.
오빠, 이제 더 이상 밥그릇에 계란 안 풀어도 돼!
아내는 득의양양하게 거대한 유리컵을 들어 보였다. 새벽배송으로 날아온 계량컵인데 딱 '맥주 500잔' 크기였다. 항상 조그만 밥그릇에 계란을 푼다고 고생이 많았는데, 이제 우리도 전문 셰프처럼 폼나게 계란을 휘저을 수 있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진 아내의 탄식
아.. 이거 깨졌네. 교환해야겠다..
아내의 눈을 따라가 보니 계량컵 윗부분, 그러니까 일반 컵으로 따지면 입이 닫는 부분이 살짝 깨져 있었다. 원래 불량품이었는지 배송 과정에서 깨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손에 베일 수 있다 보니 그대로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이걸 어쩐다. 아내와 대화하는 불과 몇 초 사이 계량컵의 신분은 중고품으로 바뀐 상태였다.
이미 아내의 오른쪽 검지에는 '품질보증표시'가 적힌 하얀색 종이가, 중지에는 'USA No.1'이라고 쓰여 있는 광고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품질보증표시는 아예 반으로 찢어졌고, 광고 스티커는 쭈글쭈글해져 버렸다.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내에게 물었다.
"만약에 우리가 정상 배송 온 계량컵을 떨어뜨려도 이렇게 깨질 수 있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데 이 업체에서 정말 교환을 해줄까?"
"그럼 당연히 해주지"
"요즘 블랙 컨슈머가 얼마나 많은데, 우리가 거짓말하는 걸 수도 있잖아?"
다행히(?)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내가 깨진 유리컵 사진을 찍어서 새벽배송 업체 앱에 올린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정말로 교환 결정이 떨어졌다. 소비자의 힘이 이렇게 셌나. 새삼 신기했다. 문득 30년 전 내가 겪었던 'XXX바 사건'이 떠올랐다.
XXX바는 90년대 초반 어린이들에게 인기 최고였던 파인애플 맛 아이스크림이다. 슈퍼히어로 옷을 입은 남자가 파인애플을 향해 '표창'을 던지면, 파인애플이 잘게 쪼개지면서 아이스크림으로 바뀌는 광고가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 아주머니가, 그 맛있는 XXX바 여러 개를 들고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이다. (90년대만 해도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실제로 곳곳에서 실천되고 있었다.)
아주머니 손에 들려 있었던 XXX바가 정확히 몇 개였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건, 옆집 아이가 슈퍼에서 사 먹은 XXX바에서 뭔가 '쓴 맛'이 났고, 아이스크림 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한 달 후에 영업사원이 그 아이스크림 한 상자를 들고 옆집에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왜 한 달씩이나 걸렸냐고?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소비자가 회사에 문제(컴플레인)를 제기할 수 있는 수단은 '전화'뿐이었다.(아, 집에 편지봉투가 있다면 우편도 가능하긴 했다.)
아마도 옆집 아주머니는 해당 업체 소비자 상담실에 처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얼마 후 담당자가 정해져 아주머니께 전화를 했을 것이고, 만약 그 시간에 아주머니가 집에 있었다면 마침내 아이스크림 회사 담당자와 통화를 했을 거다.(당시에 전화는 집전화와 공중전화뿐이었다.) 통화로 당시 상황을 다시 한번 한참 설명한 뒤, 며칠 후 영업사원이 방문해 옆집 아이가 먹다 남은 XXX바를 수거해 갔을 것이다. 그리고 자체 검사를 마친 뒤 아이스크림 한 박스라는 보상 조치가 이뤄졌을 게다.
인터넷은커녕, TV 뉴스 채널도 딱 3개밖에 없던 시절이다. 문제 제기할 곳이라곤 아이스크림 회사 소비자 상담실뿐이니 소비자로선 한 달이든 두 달이든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불과 2000년대 중반까지도 컴플레인이란 참 힘이 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가 세상에 스마트폰이라는 신문물을 내놓으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소비자들에게 '묠니르'(마블 히어로 '토르'의 무기)가 생긴 것이다.
아내가 오늘 아침에 한 것처럼 사진 한 장 찍고 내용 적어서 올리기만 하면 몇 분 만에 교환 판정이 난다. 스마트폰에는 소비자 상담실만 들어가 있는 게 아니었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친구들이 모여있는 SNS 채널들, 이건 기업 입장에선 심각한 리스크였다. 소비자는 이제 구구절절하게 아이스크림 업체 소비자 상담실 전화통만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냥 인별그램에 이렇게 쓰면 된다.
왜 XXX바에서 쓴 맛 남?
"대박!" "앞으로 다신 안 사 먹어!"라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러니까 이런 파국을 막으려면 교환 요청에 빛의 속도로 응해줘야 한다. 오히려 (SNS에 올리거나 언론사에 제보하지 않고) 조용히(?) 교환만 요청하는 고객에게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30년 전 옆집 아주머니처럼 한 달이나 처리를 기다려줄 고객은 지금 한 명도 없다.
그런데 컴플레인이 너무 쉬워졌다고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도 많아진 게 문제다. 이런 사람들을 '블랙 컨슈머'라고 부른다. 물건을 실컷 사용해놓고 뻔뻔하게 교환, 환불을 요구하거나, 아예 구매한 적도 없으면서 허위 비방을 하는 사람까지 있다.
이런 사람들이 점점 늘면서 안타깝게도 기업이든, 같은 소비자 입장에서든 특정 공감대가 생겨버렸다. 바로 "더 이상 소비자 컴플레인을 100% 믿기는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블랙 컨슈머들로 인해 피해를 보는 건 누굴까? 물론 1차 피해자는 기업일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선량한 소비자도 함께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이미 일부 기업들은 블랙 컨슈머를 이유로 기존 고객들이 누리던 혜택을 조금씩 없애기 시작했다. 미국에까지 상장한 국내 대표 인터넷 쇼핑몰 C업체는 구입한 지 30일이 안 됐으면 무조건 반품해주던 '묻지 마 환불' 정책을 최근 중단했다. 하자 있는 제품은 여전히 반품이 가능하다고 강조하지만, 어쨌든 기존에는 1도 없었던 '반품에 대한 부담'이 새로 생긴 건 사실이다.(물론 이 조치가 블랙 컨슈머 때문이 아니라 해당 업체의 수익성 제고 차원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어쨌든 블랙 컨슈머가 '빌미'를 제공한 것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아이스크림에서 정말로 쓴 맛이 나서 문제 제기를 해도 '혹시 블랙 컨슈머 아니냐'며 양치기 소년 취급을 받는 날이 올지도 모르고,
내가 아내에게 했던 말, "요즘 블랙 컨슈머도 많은데 우리를 어떻게 믿고 교환을 해주겠냐"는 우려 역시 현실이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나는, 컴플레인이 쉬워진 만큼 이 힘을 현명하게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진 유리 계량컵이 배달 와도 '이 업체가 과연 내가 깨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까?'라는 바보 같은 고민을 할 게 아니라, 아무 부담 없이 곧바로 교환 요청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말이다.
또 다른 <일상의 인상>이 이어집니다.
<오늘도 아내를 바늘로 찔렀다(부제: 난임부부 생존기)> 읽기 https://brunch.co.kr/brunchbook/sadneed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