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제주도 이야기

2024. 07. 05 지난 일기

by 정말빛

역시 오기를 잘했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부으면 어떠랴. 제주도 비는 냄새도 다르지 않은가.
제주도 무한 동경녀인 나는 장맛비 소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행기를 탔다.
일기예보가 틀린 것에 대해 항의하는 전화를 받은 기상캐스터가 어쩔 줄 모르고 좋아한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고맙다나 뭐라나. 어이가 없었다. 드라마 질투의 화신에서.
나는 틀린 날씨가 얼마나 고맙던지. 제주도 하늘은 저세상 빛깔이었다. 음… 그냥 파랗다 말고 더 좋은 표현이 뭐가 있을까? 꿈을 담은 하늘색이 좋겠다.

이번여행의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는 사려니 숲 등받이 벤치에 누워 책을 여한 없이 읽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제주에서 작가처럼 글을 쓰는 것이다. 내가 작가로 성공해서 돈을 번다면 제주도에 작업실을 하나 사는 것이 꿈이다. 어차피 돈은 벌테니까 미리 사전 답사를 가서 분위기를 알아보자는 취지였다.

비행기가 한 시간 이상 지연되어 도착 시간이 늦어졌지만 숙소를 보고는 이내 마음이 풀렸다. 스타벅스가 1층에 있는 용두암 바닷가 앞 호텔. 호텔이라기에는 민망하지만 내부는 깔끔했다. 스벅에서 허니자몽 블랙티를 한잔 시키고 이여사에 대한 글을 신나게 썼다.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작가냐고 물어주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아이패드를 꺼내고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젊은이들이다. 남해에서나 통하는 거였다.

밤바다는 아름답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지고 멀리서 보이는 불빛과 파도 소리에만 집중하게 된다. 제주에 살고 싶은 첫 번째 이유다. 물멍을 원 없이 할 수 있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고요의 시간에 나를 만나고 글을 만난다. 사유와 성찰은 내 안에서 조용히 잠을 깬다. 아름답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다에 물이 꽤나 빠졌다. 자러 가야겠다.

이튿날이다. 사려니 숲에서 소원 하나를 이루고 두 번째 목적지인 아부오름으로 향했다. 아부오름은 어느 블로거가 10분이면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며 올린 사진에 홀딱 반해 이번 여행의 목적지에 넣었다.


내가 오름 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이 12시 정각이었다. 비는 무슨... 햇빛이 너무 뜨거워 밖에 나갈 엄두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내가 봤던 사진의 인상이 정말 강렬했다. 선크림을 덧바르고 차에서 내렸다.
12시 4분. 출발.

정말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정상에서 보는 풍광은 사진보다 더 아름다웠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오름 둘레를 걷는 둘레길 이정표를 보고 만 것이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더 무서운 건 사람이 없었다. 나처럼 혼자 올라와 화보를 찍는 젊은 여성은 하늘하늘 원피스 차림으로 더 이상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자.

빨강에 가까운 진보라의 수국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앞으로 전진하자 작은 숲길이 나왔고 바닷소리인지 바람소리인지 알 수 없는 자연의 소리가 들린다. 새소리도 들렸다. 그냥 놓치기가 아까워 카메라를 켜고 동영상으로 소리와 바람을 담았다. 나비가 어째 그리 많은지. 나비 본 지가 한참이라 반갑기도 하고 나비도 살 수 없는 아래 세상에 사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자연은 계산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하나를 뺏어가면 반드시 우리 것도 뺏어간다. 사람들은 도시와 편리함을 얻은 대신 나비와 새소리를 빼앗겼다. 뭐라 반박할 수 없는 정확함이다.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뺏기는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둘레길을 다 돌고 오니 아까 그 젊은 여성은 그늘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더위에 지쳐 그 옆에 눕고 싶었지만 부끄러워 그냥 내려왔다.

온몸은 땀에 젖어 있었지만 내 눈과 마음은 충만했다.
어려서는 불편한 여행을 싫어했다. 여행 가방에 갈아입을 옷을 잔뜩 넣어 맛있는 것 먹고 예쁘게 사진을 찍어 싸이 월드에 올리기 바빴다.
내 여행의 목적이 달라졌다. 다른 사람에게 뽐내기 위함이 아닌 내 마음의 안식으로. 나는 쫄쫄이 바지에 티셔츠 하나 달랑 걸치고 여행 내내 돌아다녔다.
차에 올라 거울을 보니 땀에 얼룩진 선크림 자국이 보기 흉했다.

정상의 그녀는 지금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