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에서의 나의 삶은 유방암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유방암 치료는 개인적인 삶의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암치료로 인해 모든 삶이 이전과 이후가 많이 바뀌었으니 말이다. 암치료를 받기 전에는 모든 것은 남편 중심으로 돌아갔다. 남편의 가족을 만났고, 남편의 수많은 친척들을 만났고, 남편의 친구를 만났다.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프랑스에서 자랐고 프랑스를 떠나서 살아본적이 없는 그들은 프랑스 이상의 세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적이 없는 사람들 같았다. 프랑스가 최고라는 자민족 중심주의로 똘똘 뭉쳐서 프랑스어만 구사하는 그들과 프랑스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나와의 사이에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벽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소수자인 한명에 불과했고 그들은 다수였다. 그렇기에 이상과 정의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이 아닌 현실적인 생활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프랑스어를 조금이라도 잘 하는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본인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잘하는 남편이 거의 모든 결정권은 가지게 되었고 나는 조력자로써 나아가 자립된 인간이 아닌 한 남편의 부인으로써 부속적인 종속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상황이 내가 유방암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의 재편성이 시작되었다. 이유는 치료를 받기 위해서 나는 생존 프랑스어를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나는 나의 의견을 남편의 입과 귀와 뇌를 통하지 않고 내가 직접 상황에 맞닥뜨리며 적응해 나가야 했다. 이것은 힘든 과정이었지만 나의 자립을 향한 한걸음이었다. 생존 프랑스어와 함께 나는 남편을 동반하지 않고 혼자서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던 삶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아기가 커가면서 혼자 아장아장 걸음마를 내딛으며 부모님의 슬하로부터 자립하는 과정과도 같았다. 또한 암치료를 받으면서 나는 남편의 지인들만 만나야 하는 상황이 아닌 오히려 남편이 나의 치료를 위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야 하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주치의, 수술의, 종양의를 비롯한 병원관계자들, 재택 간호사, 앰뷸런스 기사들, 불꺼주는 니꼴 할머니 등을 포함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렇게 결혼초부터 2년동안 기울어져 있었던 운동장이 재편성되기 시작했다.
나는 생존 프랑스어를 위해 항암치료와 함께 프랑스어를 배우러 직업훈련기관에 다녔고, 항암과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나서는 국립대 어학원을 다니며 프랑스어를 체계적으로 배웠다. 그 뒤로 외국인이 아닌 프랑스 현지인들과 함께 포마씨옹을 들으면서 인턴 생활을 하며 그들의 생활 속에 깊이 관여하게 됨으로써 프랑스라는 사회에 융합적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결혼전에는 내가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과 결혼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고 게다가 같이 살 사람이 프랑스인이 될거라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프랑스인과 결혼해서 프랑스에 살게 되면서 결혼 이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으며 그 중 하나는 ‘언어의 중요성’이었다. 프랑스어때문에 나는 6년 정도 어려움을 겪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프랑스인과 결혼하고 나서야 비로서 알파벳과 발음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현재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 프랑스어는 나에게 쓸데없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결혼했던 2016년부터 2022년까지 프랑스어는 나를 괴롭혔다. 프랑스어로 내가 문제 해결해 나가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프랑스인들과 함께 들었던 포마씨옹이 끝나던 2023년 초반, 즉 프랑스에서 7년째 살면서부터 내가 만나고 있는 거의 모든 프랑스인들과 일상 대화가 편하게 가능해지면서 나의 삶의 질이 높아지고 있다. 즉 내가 스스로 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나에게 닥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고 있다는 말이다.
두번째로 프랑스에 살기 전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중 하나가 전업주부를 포함해서 직업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보는 프랑스인들의 시각이었다. 결혼을 한지 한달도 되지 않아서 가족행사모임이 있었다. 시부모, 두명의 시누이와 그들의 가족들, 남편의 여자 사촌 S의 가족들 이렇게 모였다. 여자 사촌 S가 나에게 프랑스에서는 무슨일을 할거냐고 질문을 했었다. 그 당시에는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내가 어디가서 일을 해야 되는거지 싶어서 그냥 넘겼다. 그러나 내 주변의 커플들을 보니 프랑스인과 결혼을 해서 약 3년이 지나면 파트타임이라도 일을 해야 되지 않느냐는 주변의 압박이 시작된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물론 공부를 하라고 남편이 학비를 지원해 주는 커플도 있다는 말도 들었으나 나의 시부모를 비롯해서 시댁 친척들은 모두 무조건 일을 해서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쪽이다.
내가 남편과 결혼했을 때는 마흔이 넘은 나이였다. 보통 마흔이 넘어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직업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내가 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간과했다. 프랑스에서 일을 할 수 정도로 프랑스어 수준을 높인다는 것이 이렇게 시간이 걸릴 거라고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부모님이 나에게 프랑스어 능력이 안되면 청소부를 해서 돈을 벌라고 압박을 준다. 내가 잘하는 일은 청소가 아니라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것이지만 이것은 수익성이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막노동의 일을 하고 있지 않는 나는 사회의 기생충이다.
시댁의 험담과 괴롭힘은 내가 프랑스에 살게 된지 7년이 되던 2023년에 집요해졌다. 이런 괴롭힘이 만약에 내가 프랑스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던 초반에 이루어졌다면 지금 나는 아마도 프랑스에서 버티면서 살고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시부모와 나와의 사이에서 남편이 제대로 중재할만한 인물도 아니고 또한 가제는 게 편이기 때문에 지속되는 시댁의 괴롭힘은 아마도 남편과의 관계도 이혼으로 치닫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프랑스에 발을 딛은지 2년이 지나서 유방암을 발견했고 3년차는 유방암 치료를 하느라 시간이 지나갔으며 그 이후는 프랑스어를 배워서 프랑스인들과 함께 포마씨옹을 받았으니, 내가 자립할 수 있을만큼의 프랑스어를 향상시킬 시간을 유방암이라는 사건으로 벌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하고 값진 것인데 나는 유방암으로 그 귀중한 시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귀중한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해서 나는 자립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이 땅 프랑스에서 사용하는 언어인 프랑스어로 나의 의견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의 향상이다. 이로써 2023년 겪게 된 많은 문제들을 주변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해결책을 찾아서 문제들을 해결하며 나의 인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프랑스 남부의 시골마을에서는 지인의 소개가 아니면 마음을 좀처럼 열지 않은 이 곳 사람들의 특성상 인맥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그들이 사용하는 프랑스어를 나도 구사할 수 있게 되면서였다. 7년에 걸친 프랑스 생활을 담은 이 책은 프랑스에서의 나의 투쟁의 보고의 결실이기도 하며, 타국에서 나의 힘으로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강한 의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