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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어리 Nov 01. 2022

나의 특별한 읽기 선생님

나의 특별한 읽기 선생님     

 둘째 아이가 동화책을 소리 내 읽었다. 벌써 몇 번째 같은 문장을 읽고 있는지 모른다. 소리 낸 글자가 하나라도 틀리면 다시 앞부분부터 시작하니 책장이 도무지 넘어가질 않았다. 나는 모르는 척 기다렸다. 잘 읽는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에서다. 아이 눈에는 세상 책 잘 읽는 똑똑한 엄마로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아이가 모르는 비밀 하나가 있다.

 20년 가까이 책 읽기와 글쓰기 지도를 하고 있는 나는 사실 읽기 장애를 오랫동안 겪어 왔다. 의미를 파악하는 독해력은 어느 정도 정상이지만 문자로 표기된 단어를 말소리로 바꾸는 해독 능력이 많이 떨어졌다. 어렸을 때는 공부 잘하는 언니, 오빠들 틈에서 자라 또래 친구들보다 나름 아는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말하는 것이 유창했고, 똑똑한 티를 냈기에 모두들 내가 읽기 능력이 안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조차 선생님이 선창을 하면  뒤따라 입만 뻥긋거리는 일이 많았던 때라 읽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더욱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5학년 때였다. 어느 날 선생님이 내게 사회 교과서 몇 페이지를 읽어보라고 하셨다. 그 부분은 처음 배우는 단원인 데다 낯선 지역명과 생소한 단어들이 많았다. 나는 처음부터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분명히 글자 모양을 읽고 있는데 내 생각과 다른 소리가 나왔다. 긴장이 느껴지는 순간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흐트러졌다. 선생님은 글자가 틀릴 때마다 계속 지적을 했다. 같은 자리를 맴돌며 읽느라 페이지가 넘어가질 못했다. 그렇게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계속된 읽기 평가는 자신만만했던 나의 유년 시절을 순식간에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트라우마를 벗어나기까지 한 참의 암흑기가 있었다. 나는 매번 수업시간 때마다 읽기에 걸릴까 봐 조마조마 떨었고, 쉬는 시간이면 교과서를 몇 번이나 반복해 읽는 연습을 해야 했다. 얼마나 공포스럽고 답답했던지 학교에 안 가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뒤늦게 서야 나는 음운 인식 능력이 떨어져 소리를 글자와 연결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음운 인식 능력은 귀로 들은 소리의 내부적 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인데 청력이 좋지 않은 나 같은 경우에 읽기에 어려움이 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땅한 치료 방법은 없었다. 터널 속에 갇혀 있을 뻔했던 그 시절, 나는 내 인생 가장 훌륭한 읽기 지도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중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동화책 ‘안네의 일기’를 선물로 받았다. 안네는 내 생애 최초 가장 슬픈 이야기 속 주인공이었다. 나이도 나와 같은 안네가 겪은 고통과 슬픔에 난 온통 몰입되고 말았다. 안네가 ‘키티’에게 속마음을 말하듯 쓴 문장 하나하나를 나는 매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곱씹어 읊조렸다. 많은 시간 눈물을 흘리며 안네를 만나고, 내가 안네가 되어 그의 마음을 읽는 순간 글자를 이상하게 읽는 13살 찌그러진 깡통 같은 나는 점점 사라지고 없었다.

 <안네의 일기>를 시작으로 나는 책 읽는 즐거움에 빠졌다. 읽기 훈련을 위한 읽기가 아닌 마음으로 읽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책 속 주인공들이 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실감 나게 읽다 보니 나는 어느새 책을 잘 읽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나는 어떤 글을 읽을 때 소리와 함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래서 여전히 책을 읽는 속도가 많이 느리다. 그렇지만 눈과 입으로만 대충 읽는 것과는 다른 감동을 선물처럼 얻는다.

 여전히 책 한 장을 더디게 넘기는 아이를 본다. 그럼 어떤가. 난 느리게 읽어도 재밌는 책은 깔깔 웃으며 보고, 한 글자 틀리게 보더라도 슬픈 책은 꺼억꺼억 울며 보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의 읽기를 지도해줄 스승님이 어디쯤 계실까? 책꽂이를 뒤적이다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엉터리로 글을 읽던 어릴 적 엄마의 비밀 이야기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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