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8 [에세이] 크리스마스 근무일지
24일 밤 10시 40분. 교대 20분 전, 매장 안은 낮의 흔적을 반쯤 털어냈다. 앞 타임이 올려둔 인수인계 노트엔 짧게 두 줄. “담배 5번랙 L잔량 부족, 새벽 수거 없음. 냉동 경고등 1회(해제).” 나는 습관대로 POS에 로그인한다. 단말기 터치패드에 남은 체온이 손끝에 전해진다. 서랍에 들어 있던 차액 봉투를 다시 세어 맞춘다. 서랍 안에는 늘 그 자리에 있는 동전들이 있고, 그중 몇 개가 희미하게 눅은 손냄새를 품고 있다. 50원짜리가 모자라다 싶어 서랍 깊숙한 비상 롤을 들추니 구겨진 동전 봉투 하나가 나온다.
이런 사소한 균열은 내게 오래 남는다.
오늘 밤의 균형이 거기서 시작되니까.
바닥은 반쯤 말라 있고, 제설제 얼룩은 조명 아래서 은색으로 번뜩인다. 미끄럼주의 삼각 팻말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오늘은 사람들 발자국이 적당히 말라 있으니 넘어지진 않을 거다. 조명은 일정하다. 음료 매대의 냉기, 프린터의 전열 냄새, 그 사이에 내가 있다.
냉장고 압축기는 간헐적으로 ‘웅—’ 하고 울고, 그 사이사이로 POS 화면이 ‘이벤트 종료 임박’ 라벨을 불필요하게 반복한다. 이브라고 특별할 건 없다. 루틴이 정확하다.정확하다는 건,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11시 정각, 앞 타임 근무자 인사하고 나간다. 자동문이 닫히며 차가운 공기가 한순간 들이닥쳤다 나간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매장은 다시 정적을 회복한다. 시계 초침이 한 칸씩 움직이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첫 30분은 보통 조용하다. 담배 랙 숫자 맞추고, 와인 코너 페이싱을 다시 고른다. 같은 병을 라벨 정렬선에 맞춰 세워두면 매장 전체가 정리된 느낌이 생긴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건 나 자신을 위한 정리다.
첫 손님은 11시 20분쯤 들어왔다. 커플이었다. 남자는 맥주 매대에서 라거와 에일을 번갈아 집어 들고, 여자는 스파클링 와인을 라벨 색로 비교한다. 서로 한 번씩 눈 맞추고, 아무 말 없이 각자 고른 걸 맞추는 식이다.
서로 고른 병이 맞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계산대 앞에 와서야 여자가 묻는다.
“잔 있어요?”
“종이컵 오른쪽에서 가져가시면 됩니다.”
돌려 따는 병이라 오프너는 필요 없다. 영수증이 뽑혀 나오고 문이 닫힌다. 와인에서 묻어 나온 단향이 잠깐 남는다. 그 냄새가 낯익다. 오래전 겨울 저녁, 아버지가 들고 오던 케이크 박스의 냄새. 일반적인 케이크가 아닌 롤케이크가 대신하던 때도 있었지만, 늘 촛불이 있었다. 우리 집에선 이런 날엔 당연한 풍경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람은 자꾸 그 ‘충분함’을 잊는다.
크리스마스 이브 다음날 아침 머리맡에는 비싼 선물은 아니어도 항상 초코렛에 과자를 찍어먹는 현재의 "초코픽" 같은 과자가 있었다. 당시엔 제과점에서만 살 수 있는 과자였다. 그래서 초코픽을 볼때마다 생각나는건 그 당시의 공기와 냄새다. 나에겐 추억 그 자체다.
자정이 넘으면 손님 구성이 바뀐다. 와인을 고르던 커플 대신, 혼술용 캔맥주와 마른 안주를 드는 사람들이 들어온다. 대화는 짧다.
“이거 1+1 맞죠?”
“네. 하나 더 고르시면 돼요.”
끝이다. 결제음, 영수증 잘리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매장을 관통한다. 이 시간대는 말이 길어지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다. 그 리듬이 새벽의 맥박이다.
11시 40분, 담배를 사려는 손님이 온다. 모델명을 정확히 말하지 못해 랙 번호로 확인한다.
“ 슈팅레드… 5번 칸에 있는 거요.”
“네, 오른쪽에서 두 번째.”
POS 화면이 연령 확인을 띄운다. 확인. 결제. 끝. 손님은 영수증을 거절한다. 계산대 위엔 단말기 불빛만 남는다. 나는 손가락으로 단말기 가장자리를 한 번 쓸어 지문을 지운다. 습관이다. 이런 작은 루틴들이 피로를 쪼개 준다.
12시, POS기가 한번 큰 소리를 내며 정산 영수증을 길게 뽑아낸다.그날의 정산 내역이 적혀있다. 그날의 수치들이 인쇄된 종이 위로 차가운 빛이 반사된다. 금고보관할 현금 액수를 확인하고 POS 두대의 현금을 다시 정리한다. POS 옆에는 택배 수거용 스캔기가 놓여 있다. 오늘 밤은 수거가 없다. 그래도 QR 스티커가 붙은 박스가 두 개 들어와 있다. 아침 차량이 가져갈 거라 메모만 남겨둔다.
1시 무렵, 커피 머신에 종이컵을 올리고 버튼을 누른다. 진한 향이 퍼지며 공기가 조금 누그러진다. 그 냄새는 공부방의 이브 저녁을 끌어온다. 그날은 수업 대신 치킨과 케이크를 나누고 영화를 본다. 내가 미리 주문해둔다. 박스가 도착하면 책상들을 벽 쪽으로 밀어 공간을 만든다. 대단한 이벤트가 아니다. 평소에 문제집을 들여다보던 애들이 그날만큼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화면을 본다. 불을 한 단계 낮추고 TV에 영화를 건다. 장면이 넘어갈 때마다 조명이 벽에 부딪혀 흐른다. 누군가는 케이크를 먹다 말고 그대로 멍하니 보고, 누군가는 장면마다 작은 리액션을 한다. 그들의 웃음이 공간을 메운다. 나는 뒷자리에서 종이컵 커피를 들고 앉아 있는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 시간은 수업은 아니지만, 서로 숨을 돌리는 시간이다. 아이들은 성장 중이고, 오래 끌지 않는다. 다음 타임 학생들이 들어오면 바로 원상복구한다. 박스 정리, 티슈 수거, 바닥 한 번 쓸고, TV 끄고, 조도 다시 올리고, 책상 위치 복귀. 그 루틴까지가 이브다.
1시 반을 넘기면 배달 라이더들이 몰려온다. 헬멧 턱끈을 한 손으로 잡아당기고 다른 손으로 에너지 드링크를 집는다. 어떤 사람은 바나나우유를 같이 올린다. 짧은 대화.
“오늘 좀 많네요.”
“이브라서요.”
결제음이 일정하다. 그 리듬이 새벽의 맥박이다.
냉장고 모터가 한 번 길게 울리고, 바로 뒤에 제빙기 동작음이 따라온다. 그 소리가 멈추면 매장은 더 고요해진다. 편의점은 밤이 깊어질수록 안정적이다. 밖은 겨울인데, 안은 온도도 조명도 일정하다. 누구도 나를 부르지 않고, 나도 누구를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이 정리된다. 공부방 다음 주 일정. 새로 등록한 아이의 약점 파트. 내일 강의 자료 교체 순서. 평소엔 뒤섞여 있던 것들이 매장의 소음 아래에서 줄을 선다.
2시가 다가오자, 라면 코너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는 손님이 선다. 불닭이 맞냐고 물었다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젓가락과 뜨거운 물은 셀프. 나는 굳이 나설 일이 없다. 이 시간대 손님 대부분은 자기만의 속도로 움직인다. 알아서 필요한 만큼만 챙긴다. 그 속도는 나와 닮았다.
2시 정각, 폐기 등록에 들어간다. 도시락, 샌드위치, 삼각김밥. 유통기한이 지난 걸 스캔할 때마다 짧은 소리가 난다. ‘삑.’ 유효기간은 단순하다. 지난 건 지나간다. 사람 일은 늘 예외가 많지만, 물건은 그렇지 않다. 투명 바구니가 반쯤 차면 뒤로 옮긴다. 스캔을 끝내고 폐기 영수증을 뽑고 폐기 장부에 붙인다. 그 중 먹고 싶은것은 골라내서 먹고 나머진 차가운 주류 워크인에 보관한다. 폐기 등록이 불가한 몇가지 물품이 나오면 따로 분리해 스티커를 붙이고 사진을 찍어 사장님에게 보고 카톡을 남겨놓는다.
2시 15분쯤, 중년 남자가 들어와 위스키 매대를 한 바퀴 돈다. 라벨을 읽고, 가격표를 확인하고, 다시 라벨로 돌아온다. 한 병을 들고 계산대로 온다.
“이거 행사하나요?”
“확인해볼게요.”
바코드를 찍자 화면에 행사 문구가 뜬다. 얼마 할인, 멤버십 추가 적립. 설명이 길어질 필요는 없다. 그는 고개만 끄덕이고 카드로 결제한다. 영수증은 거절. 가벼운 인사만 남기고 나간다. 문이 닫히면 다시 냉장고 진동이 들린다.
3시 40분, 매장 청소와 화장실 청소를 돌린다. 물을 너무 많이 쓰면 새벽에 바닥이 말라 있지 않아 미끄럽다. 모서리를 먼저 닦고, 가운데를 나중에 훑는다. 세제를 조금 덜 쓴다. 세제 냄새가 진하면 계산대까지 따라온다. 청소가 끝나면 마무리로 손님들이 먹다 남은 라면과 국물, 음식물들을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분리해 버린다. 문을 닫고 손을 씻는다. 손등에 남은 락스 냄새가 커피 향과 섞인다.
4시, 소주 진열 앞에서 서성이는 남자가 있다. 아예 한두 잔만 할 생각인지 캔맥주로 바꾼다. 계산대까지 오기 전에 한 번 더 바꿔 들더니 결국엔 맥주 두 캔과 오징어채. 결제는 단순하다. 영수증은 역시 거절. 이런 선택의 망설임은 멀리서도 보인다. 사람들은 이 시간대에 본인의 컨디션과 타협한다. 그 타협을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물건이 말한다.
4시 15분, 커피 머신 옆에서 컵라면을 올린다. 뜨거운 물을 붓고, 김이 천천히 올라온다. 뚜껑을 반쯤 덮어 둔다. 3분. 그 사이에 카운터 밑 창고에서 테이프와 행사용 가격표를 꺼내 정리한다. 라면이 익으면 뚜껑을 젖히고 면을 한 번 들어 올린다. 조용한 새벽 공기에서 증기가 가라앉는다. 이게 올해의 이브다. 특별하지도, 즐겁지도, 그렇다고 아쉽지도 않다. 하나의 날짜가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걸 인정하면 오히려 편하다. 특별함이 사라졌다고 공허한 건 아니다. 특별함이 사라져도 평범함은 제 자리를 지킨다.
4시 30분, 아이 손을 잡은 어른이 들어온다. 크리스마스 포장 과자 매대 앞에서 아이가 한참 서 있다가 초콜릿으로 바꾼다.
“이게 더 예뻐요.”
어른은 고개를 끄덕인다. 계산은 빠르다. 아이는 영수증을 챙긴다. 자동문 센서가 작게 울린다. 사라지는 발자국. 그 정도 장면이면 충분하다. 이른 아침의 평화는 설명이 필요 없다.
4시 45분, 제빙기 상태등이 한 번 깜빡인다. 얼음이 가득 찼다는 표시다. 점검표에는 오늘 날짜와 시간만 적어 둔다. 아침에 오는 사람이 다시 확인할 거다. 담배 랙엔 빈 칸이 두 개 생겼다. 주문서에 체크. 야간 공급이 아니니 내 몫은 아니다. 하지만 체크는 한다. 지적받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빈칸을 그냥 둘 수가 없다.
5시가 넘어가면 공기가 바뀐다. 가로등이 하나둘 꺼지고, 아침 배송 트럭들이 동선을 잡는다. 반려견이 줄을 당겨 문 앞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간다. 공사장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김밥과 따뜻한 캔커피를 고른다.누군가는 담배를 산다. 말은 거의 없다. “영수증 필요 없어요.” “네, 조심히 가세요.” 정해진 문장만 오간다. 그런 문장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 문장들은 실패하지 않는다.
5시 20분, POS의 재고 수량을 한 번 더 맞춘다. 영수증 롤 잔량 체크, 라이터·배터리·가글 미니 사이즈 전면 배치. 카운터 밑 서랍을 닫고, 키패드를 닦는다. 손끝이 기름지지 않게 젤을 아주 조금만 쓴다. 과하면 키가 미끄럽다. 문득 생각난다. 공부방의 이브도 끝나고, 아이들은 대부분 늦게 잔다고 했다. 내일은 오전 타임이 비어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럼 오후에 모의고사 해설을 조금 길게 가져가도 되겠다. 흐름을 그려본다. 어떤 파트는 칠판 대신 큰 TV로, 어떤 파트는 프린트로. 순서만 정해 두면 내일은 수월하다.
5시 35분, 카운터 옆 쓰레기통을 비우고, 바닥에 떨어진 영수증 조각을 모은다. 모서리 먼지는 빗자루로 긁어 모은 뒤, 쓸개비로 한 번에 올린다. 와인 코너 유리 선반에 있는 손자국을 유리 세정제로 지운다. 닦고 나면 매장이 한결 넓어진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냉장고 유리문 사이 틈에 낀 종이 조각을 핀셋으로 빼낸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의외로 눈에 거슬린다.
5시 45분, 교대 알바한테서 “10분 뒤 도착” 메시지가 온다. POS에서 로그아웃하고, 인수인계 노트를 쓴다.
“담배 5번랙 L 3갑 이하, 와인 포토존 페이싱 정렬, 택배 2건(아침 수거), 제빙기 정상, 냉동 경고 0.” 폐기 바구니는 뒤에 올려두었고, 배달 캐비닛은 잠갔다. 카드 단말기는 충전선 상태 양호. 잔돈함 이상 없음.
5시 55분, 교대가 들어온다.
“이브 어땠어요?”
“평소랑 비슷했어요”
구체적으로 말할 게 없다. 정말 비슷했다. 그는 패딩을 벗고 POS에 로그인한다. 나는 서랍에서 내 물건을 챙기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자동문이 열리자, 바깥 공기가 얼굴에 닿는다. 공기는 아직 차갑지만, 날카롭진 않다.
뒤돌아보면 매장은 내가 들어왔을 때와 거의 같다. 페이싱은 유지되고, 바닥 얼룩은 아까보다 덜 보이고, 담배 랙엔 빈칸 두 개만 남아 있다. 새벽의 리듬은 이런 식으로 지나간다. 특별함은 없고, 아쉬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 대신 할 일을 했다. 그게 끝이다.
바깥은 동이 틀 기세다. 길 건너 건물 창문 몇 칸이 먼저 켜진다. 버스가 하나 지나가고, 가로등이 묶음으로 꺼진다. 주머니 안에서 열쇠가 굴러다닌다. 발걸음은 일정하다. 오늘은 공부방 오전 타임이 없다. 낮잠을 40분쯤 자고, 오후 수업 전에 교재를 조금 더 손봐야겠다. 애들이 싫어하는 파트를 맨 앞에 놓지 말고 중간으로 밀어 넣을 것. 영화 보던 날에서 바로 어려운 문제로 넘어가면 집중이 깨진다. 그 정도 균형만 맞추면 된다.
생각해보면, 크리스마스는 내게 그런 성격의 날이다. 예전엔 케이크가 있었고, 촛불이 있었고, 집안에선 그게 절차였다. 지금은 편의점 야간근무와 공부방 이브 일정이 섞인 날이다. 둘 다 특별하진 않다. 하지만 둘 다 무너지지 않는다. 편의점은 소리와 빛과 냄새로 굴러가고, 공부방은 시간표와 교재와 좌석 배치로 굴러간다. 어디에도 과장은 없다. 그걸 유지하는 게 일이다.
나는 길을 건너며 손을 호주머니 깊숙이 넣는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오고,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일이 온다. 이브가 지나 크리스마스가 되고,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평일이 된다. 그 사이에 할 일들이 줄을 선다. 매장에선 페이싱, 공부방에선 프린트, 그 외엔 청소와 정리. 그 정도다. 과거의 냄새가 잠깐 떠오를 때가 있어도 길게 붙잡지 않는다. 붙잡을 이유가 없다.
자동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짧게 울린다. 나는 속도를 조금 늦춘다. 차가운 공기가 폐 안쪽을 한번 긁고 지나간다. 오늘도 별다른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나쁘지 않다. 하나의 날짜가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게 내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