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번 문항은 죄가 없다

by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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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5년간 사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왔다. 수많은 시험과 문제, 그리고 그 앞에서 좌절하고 환호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시험은 때로 지식보다 태도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것을. 2019학년도 수능 국어 31번 문항을 둘러싼 소동은, 우리 사회가 ‘어려움’이라는 현실 앞에서 어떻게 정답 대신 핑계를 찾아 헤매는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 괴물이 된 문제, 희생양이 된 본질


그해 수능이 끝난 후, 국어 31번 문항은 ‘역대급 킬러 문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온갖 비난의 중심에 섰다. 뉴턴의 만유인력을 다룬 이 문제는 수많은 수험생을 좌절시켰고, 언론은 “국어 시험인지 과학 시험인지 모르겠다”며 비판을 쏟아냈다. 정답률 18%라는 처참한 성적표는, 이 문제가 마치 교육 과정의 실패를 증명하는 괴물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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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그 소란 속에서 다른 것을 보았다. 수능 국어 영역의 본질은 처음 보는 지문을 배경지식 없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독해하고 추론할 수 있는가를 평가하는 데 있다. 과거에도 자동차 엔진의 작동 원리나 DNA 복제 과정처럼 생소한 과학 기술 지문은 꾸준히 출제되어 왔다. 그때마다 시험이 물었던 것은 ‘네가 이 지식을 아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정보만으로 이 글의 논리를 따라갈 수 있느냐’였다.


31번 문항 역시 마찬가지였다. 복잡한 물리 법칙을 계산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문이 제시한 ‘구각 이론’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이해하고, 주어진 조건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물었을 뿐이다. 심지어 지문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다섯 개의 선택지 중 유독 논리적 비약이 심한 하나를 골라낼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지극히 ‘국어적인’ 문제였다.


2. 핑계가 된 시험, 위로가 된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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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문제는 그토록 큰 논란이 되었을까. 나는 그 이유가 문제 자체가 아니라, 시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다고 본다. 시험을 망친 수험생들에게 31번 문항은 자신의 실패를 정당화할 수 있는 완벽한 핑계가 되어주었다. “내가 공부를 안 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잘못된 것이다.” 이보다 더 달콤한 위로가 있을까.


그리고 기성세대는 그들의 편에 섰다. 수험생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착하고 배려심 있는’ 어른의 모습으로 비쳤다. 그렇게 31번 문항은 수험생들의 불안과 기성세대의 동정이 만들어낸 거대한 파도 속에서, ‘나쁜 문제’라는 희생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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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현장에서 안다. 저런 유형의 문제는 지난 20년간 수많은 기출문제와 모의고사, EBS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져 왔다는 것을. 저 문제를 핑계로 삼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그동안의 훈련을 게을리했다는 고백과 다르지 않다.


3. 변별력이라는 이름의 필요악


해마다 수능이 끝나면 “교과서에 없는 것을 냈다”는 비판이 반복된다. 하지만 교과서에 있는 것만으로 시험을 치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변별력을 가질 수 없는 단순 암기 테스트에 불과하다. 깊은 사고력을 가진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가려내기 위해, 시험은 때로 ‘낯선 벽’을 세워야만 한다. 31번 문항은 바로 그 벽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수능이 초창기의 날카로움을 잃고 점점 더 정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수능은 만점자가 거의 나오지 않을 만큼, 예측 불가능한 사고력을 요구하는 시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분석과 패턴화된 훈련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생각’하는 대신 ‘기술’로 문제를 푼다. 그러니 가끔씩이라도 등장하는 31번과 같은 문제는, 어쩌면 변질되어가는 수능의 본질을 지키려는 마지막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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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려운 문제 앞에서 너무 쉽게 분노하고, 그 분노를 정당화할 핑계를 찾는다. 하지만 진짜 성장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2019년의 그 킬러 문항은 우리에게 묻고 있었다. 당신은 진정으로 문제를 풀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그저 또 다른 핑계를 찾고 있을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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