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앞에서 식은땀 흘리기
내가 유일하게 챙겨보는 예능 프로그램은 오은영 박사가 나오는 <금쪽같은 내 새끼>와 <금쪽 상담소>이다.
자신과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로 인해 상대와 온전히 결합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대게 강박적인 증상에 괴로움을 토로하거나, 의존 또는 집착 관계, 신경증과 공포증에 시달린다. 근데 이런 증상에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인간은 어떤 면에선 모두 정신 문제를 가지고 있다. 평생을 타인과 함께 살아야 하기에 희미하게 행복하고 숨 쉬듯 저주스럽다.
"꺼져, 엄마 죽어버려"라고 외치던 아이는 금세 "엄마 어딨어", "제발 안아줘"하고 울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단순히 아이라서 그럴까? 그 아이가 성숙해지지 못한 채로 성장하면 우리는 여전히 어쩔 줄 몰라하는 어른이 된다.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면 가장 가까운 가족이 원수지간보다 못하다.
매번 소리를 지르고 행동 통제가 되지 않는 아이가 나왔다. 아이는 지능에 문제를 겪고 있었고 엄마는 그 상황에 지쳐 무기력과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그런 엄마를 향해 오은영 박사는 묻는다.
"아이가 무서우세요?"
무섭다는 말. 그 안에 얼마 큼의 큰 깊이가 있을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귀신을 보는 으스스함과 털이 삐쭉삐쭉 올라서는 그런 무서움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에서 공포는 두려움이라고 했다. 저 단어 하나에 많은 의미가 담겼을 거다. "아이가 두려우세요?" 아이의 증상이 두렵고, 그게 평생 나와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 두렵고, 도망가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으며, 나와 가장 닮은 존재의 가시 돋친 말들이 나의 마음을 총상처럼 헤집어 놓는 것이다.
자비에 돌란은 데뷔작부터 <나는 엄마를 죽였다>로 가족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니 그의 모든 사랑과 증오는 어머니로부터 나왔다. 영화 <마미>에선 홀로 아이를 키웠던 엄마가 ADHD 증상을 겪는 아들을 보호소에서 데려와 함께 살려고 노력했지만 다시 아들을 보호소로 보낸다는 이야기이다. 아들을 포기한 엄마는 안절부절못하며 펑펑 울고, 두 번 버림받은 아들은 엄마에게 온갖 쌍욕을 퍼붓는다. 곧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들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가족은 내 모든 것을 만들어 준 신이자, 내 모든 것을 망가트린 빌런이다.
영화 <단지 세상의 끝>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12년 동안 집을 나간 주인공이 자신이 시한부 상태임을 가족에게 알리러 갔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3시간 만에 도망 나온다는 줄거리다. 장 뤽 라가르스의 희곡을 각색하여 만들었다. 주인공은 왜 가족과의 조우를 그리 두려워하는지 어떤 증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됐는지 정보는 친절히 제공되지 않는다.
주인공 루이는 계속 식은땀을 흘린다. 그는 가족이 무섭다. 머리칼에도 셔츠 등자락에도 땀이 흥건하다. 땀은 가족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최소한의 방어이며 트라우마를 마주하는데서 오는 두려움이다. 12년이란 시간이 지나서 무뎌질 줄 알았던 상처는 가족들의 언어폭력에서 드러나듯 잘려도 팔딱거리는 생선 꼬리 같다. 그는 결국 미팅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며 집을 나와 돌아선다.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못한 채.
영화 엔딩에선 뻐꾸기시계 속에서 새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 시계는 아마 루이가 견뎌온 시간들일 것이다. 시계 모양의 집에서 뛰쳐나와 훨훨 날아다닐 것 같았던 새는 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계속 부딪힌다. 집을 나왔지만 또다시 집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온 사방에 처박고 추락한 새는 큰 숨을 몰아쉬다 죽음을 맞이한다. 이 한 장면에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