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을 향해 홍주가 다가갔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이었다.
몇 번의 가쁜 숨 이후 둘은 그대로 풀썩 침대에 드러누웠다.
익숙했다. 벌써 3년째니까.
너무도 익숙해서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둘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눈을 감고 똑바로 누워 숨을 고르던 홍주는 감았던 눈을 떴다.
슬쩍 곁눈질로 혜정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랬듯, 혜정은 바로 누워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은 물어보리라 결심하고 이 집에 왔다. 정확히는 이 방에. 홍주는 이 방 천장 몰딩 어느 부분에 홈이 파여 있는지, 천장 몇 분면에 까맣게 눌어붙은 하루살이 죽은 자국이 있는지 눈 감고도 가리킬 수 있다. 이 곳에서만 수많은 시간을 보냈으니까.
하지만 막상 혜정의 얼굴을 보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게 무색하게도,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홍주는 그렇게 곁눈질로 혜정의 옆 얼굴을 보고 있었다.
언제 봐도 참 평범한 얼굴이었다. 코는 작고, 옆에서 보면 눈이 좀 튀어나왔다. 이마는 평평한데, 볼에는 적당히 살집이 올라와 있어서 꼭 만화 캐릭터 짱구같다. 몇 백번이나 본 옆 얼굴. 뭣 하나 참 예쁘네 싶은 구석은 없었다.
'감독님들이 보면 안 튄다고 엑스트라하기 좋다 하겠네'
홍주는 혜정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옆에 혜정이 지나가도 모를 거다. 그만큼 존재감 없고 튀지 않으니까. 하지만 홍주는 많은 사람들 틈에 혜정이 섞여 있어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어느새 처음과 마음이 많이 달라져 버렸다. 홍주는 이 생각을 하면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명색이 연예인인데 이렇게까지나 평범한 혜정에게 쩔쩔매는 자신이라는 게.
"저기.."
"왜? 이제 가게?"
"아니.. 그게 아니고...."
"뭐?"
"오늘도 진짜 안 알려줄거야?"
"...."
"나 이제는 정말로 진심이야"
혜정은 언제나처럼 말이 없다. 그래도 예전처럼 칼 같이 안되다는 말은 없는 것 보니, 요새 혜정도 홍주에 대한 마음이 많이 변한 듯 했다. 안 된다는 대답 대신 침묵하는 그녀를 보며 홍주는 혜정이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 알려줄거냐고"
"우리 그냥 이렇게 즐기고 이용하는 그런 거였잖아."
"뭐?"
홍주의 반문에 혜정은 대답이 없다. 일부러 세게 말했지만, 혜정은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홍주가 이제는 혹시 진심이지 않을까. 그래서 둘이 함께라면 끝까지 묻어두고 평생을 함께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
그러나 언제나 도달했던 결론처럼 그것은 절대 안 된다는 걸, 말도 안 된다는 걸 혜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홍주는 금방 변할 거다. 다시는 마음 아프고 싶지 않았다. 이용 당하다 버려질 게 뻔했다. 엄마의 말로를 봤으니까 그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정신 차리자. 이러고 나도 홍주를 이용하면서 사는 것 그 뿐이야. 난 평생 이러고 혼자여야 해.'
혜정은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았다.
"홍주야, 얼른 돌아가. 너 내일 아침 일찍 샵도 가야 하잖아. 나도 내일 일찍 출근해야돼."
".......알았어. 또 연락하자."
홍주는 말없이 혜정을 바라보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혜정이 잡아주길 바라며 일부러 느릿느릿 옷가지를 챙겼다. 하지만 오늘도 허탕이다.
혜정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문득 뒤돌아 혜정을 바라보니 혜정은 언제나처럼 빙긋 웃고 있었다.
슬퍼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홍주는 그렇게 옷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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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는 요즘 모처럼 바쁘다.
한때 잘 나가는 아이돌 그룹이었던 홍주지만 그룹 내에서 비중은 크지 않았다. 랩 세 마디, 3분 노래 중 도합 15초 정도가 홍주의 분량이었다.
홍주가 속한 그룹은 데뷔 후 1~2년은 상위 10위권 내에도 들고, 드물게 1위도 했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꽃처럼 피어났던 인기는 생각보다 금세 사그라들었다. 꽃이 피고 난 자리는 다른 꽃들로 금세 갈음됐다.
그나마 다행인건 그룹 내 비주얼 멤버 송한 덕에 그룹 인지도는 매우 높았다는 것이다.
송한은 드라마 주연도 턱턱 꿰차며 인기를 독식했고, 데뷔 십 년이 지난 지금은 명실공히 탑스타가 됐다.
송한의 출연작들이 수출되면서 자연스럽게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아진 홍주의 그룹은 한동안 해외투어를 하느라 바빴다.
국내에서는 거의 '송한과 아이들' 취급을 받던 그룹 멤버들도 해외에서는 좀 사정이 나았다. 홍주도 마찬가지였다. 조연, 어떤 때에는 비록 단역이었지만 해외 드라마에도 종종 출연하며 국내에서는 못 해봤던 배우에까지 도전했다. 몇 년을 말 안 통하는 타국에서 열심히 활동하다보니 콘서트랑 방송 수익이 제법 짭짤했다.
그 덕에 홍주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사실 혼자 살기에는 꽤나 큰 이 집은 국내에서의 재기를 꿈꾸며 무리해서 산 곳이다.
타국에서 벌이도, 인기도 국내에서보다 괜찮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이제는 국내에서 활동하고 싶었다.
특히 대세들은 꼭 출연한다는 집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보고 싶었다. 그 때를 기약하며 무리지만 고심 끝에 고른 곳이었다. 해외에서 나름 잘 나가는 아이돌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집안 가구도 수입산으로 무리해 장만했다. 영앤리치. 성공한 인생으로 보이고 싶었다. 한물간 연예인으로 구질구질하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송한의 인기가 독보적으로 치솟으면서 그룹은 결국 이년 전 해체했다.
배우 활동에 전념하고 싶다는 뻔한 이유였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말이었다. 이로서 그나마 큰 돈을 만질 수 있었던 해외 그룹 활동도 끝나버렸다.
송한은 진즉에 쟁쟁한 배우들로 유명한 대형기획사로 이적했다. 남은 멤버 몇만 기존 기획사에 남아 있었다. 그나마도 계약 기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꿈꾸었던 예능 프로그램 섭외는 잘 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룹 내 홍주의 국내 인기는 크지 않았기 때문에 단독 섭외는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그 탓에 홍주는 이 큰 집의 유지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여섯시 내고향 같은 프로그램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방송인이 돼버렸다.
연예인 유명세를 이용해 인터넷 개인방송도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수익이 나진 않았다. 회사에 나가면 눈치가 보여 사무실에 안 나간지도 꽤 됐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너무 상투적이지만 이건 기적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됐다.
한 팬이 올렸던 홍주의 그룹
태국 콘서트 영상이 유튜브 알고리즘 덕에 인기몰이 중인 것이다.
그 팬은 사이드 좌석에 앉았었는지 측면에서 그룹 영상을 찍었는데 그게 공교롭게도 홍주 쪽이 잘 보이는 각도였다.
그룹 내 비주얼이자 센터였던 송한에게만 열광했던 사람들이 이 영상으로 다른 멤버들에게까지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특히 홍주의 재발견이라며 사람들은 열광했다.
사이드에서 비중이 워낙 적어 눈여겨보지 않았던 홍주를 지금에야 알아본 것이다. 유튜브 댓글들은 하나같이 그룹의 재결합을 외쳤다.
그 덕에 홍주는 요즘 예전과는 180도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샵에 가고 이동하면서 매니저에게 빽빽이 들어찬 스케줄을 듣는 데뷔 초 같은 그런 삶.
꿈꿔왔던 집 공개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섭외가 들어왔다. 그동안 힘들게 유지해왔던 홍주의 집이 드디어 빛을 발할 순간이었다. 매니저 말로는 드라마 쪽에서도 연락이 왔다며 조만간 미팅이 잡힐 것 같다고 했다.
홍주는 요즘 더할 나위없이 기쁘고, 꿈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