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게 말도 안 되는 날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하는 것도 말도 안 됐고, 대한민국이 쟁쟁한 나라들을 제치고 8강에 올랐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그날은 대망의 4강 진출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고 1이었던 혜정도 그날은 엄마에게 늦게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친구와 영화관에서 축구 경기를 보았다. 모두가 대한민국 4강 신화에 들떠서 거리에서 맥주를 마시고 얼싸안았다. 파도타기를 하며 거리를 점령하기도 했다. 혜정의 친구는 이왕 응원 나온거 밤 열한시까지만 놀다 들어가자고 성화였지만 그날따라 혜정은 몸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그날이랑 겹쳐서 그런거리라. 혜정은 영화관에서도 꾸룩꾸룩대는 배를 움켜잡고 힘겹게 축구를 봤던 터라 친구에게 먼저 가겠다고 했다. 밤 열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평소같으면 요란스럽게 문을 열며 엄마를 불러댔을 혜정이지만 그날따라 화장실이 급했다. 혜정은 재빠르게 현관문을 열고 기척도 없이 화장실로 직행했다.
이십분쯤 흘렀나. 볼일을 보고 나온 혜정이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는데 집에 엄마가 안 보였다. 엄마가 나갔나. 그러고보니 화장실에서 나오면 정면으로 보이는 엄마방문이 닫혀 있었다. 닫힌 문 밑으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두런두런 무슨 이야기 소리도 나는 듯 했다. 혜정은 엄마가 전화를 하나보다 싶었다.
"엄마! 방에 있어?"
"....."
"엄마?"
"....."
순간, 혜정은 등에 식은땀이 쪼로록 흐르는 걸 느꼈다. 누구지? 누가 방 안에 있는거지? 무슨 용기가 났는지 엄마 방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었다. 덜컥덜컥. 요란스럽게 문 손잡이를 흔들었지만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누구야? 방에 누구야! 엄마!"
"빨리 들어가!"
그때, 혜정은 똑똑히 엄마 목소리를 들었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우당탕 급하게 무언가 뛰어가더니 닫히는 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엄마! 엄마!"
문손잡이를 더 힘껏 잡아당겼다. 덜컥덜크덕. 부서질 듯 잡아당겼다.
철커덩 짤그락.
문 쪽에서 자물쇠 같은 걸 끌르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니 급하게 티셔츠를 입었는지 머리가 마구 헝클어진 엄마가 앞에 서 있었다. 혜정은 씩씩대며 무슨일인지 해명해 보라는 듯 엄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엄마는 그런 혜정을 외면했다. 문만 열어주고는 아무말 없이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혜정은 엄마를 따라들어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게! 얼마나 놀랐는데!"
"....."
"아까 빨리 들어가라는 건 뭐야! 누가 있었어?"
".....어디까지 들었어?"
엄마는 느릿느릿 물었다. 혜정이 어디까지 알고 있나 떠보기 위해 눈치를 살피며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었다. 혜정은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제대로 말을 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화가 났다. 엄마는 대체 혜정이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누구랑 뭘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그 누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혜정은 눈이 뒤집혔다.
"누구야! 어디 숨은거야!"
혜정은 닥치는대로 뒤졌다. 사람이 못 들어갈만큼 좁은 침대밑, 문 뒤, 행거에 걸려있는 옷들 구석구석, 그리고 항상 비워져 있는 옷장 속까지. 작은 방이라 숨을 틈이 없는데 아무리 뒤져도 아무 것도 없었다. 이방은 창문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가 가려버려서 없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방 창틀에 얇은 합판을 붙여 창문을 없애 버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창틀에 붙어있는 합판을 떼내어 탈출하고 다시 붙여놓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면 분명 엄마가 했던 빨리 들어가라는 소리는 누구에게 한 거고 우당탕 소리는 무얼까.
"엄마"
혜정은 지친듯 엄마를 불렀다. 그날은 몸도 영 좋지 않은 날이었다. 얼른 쉬고 싶었는데 엄마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
"엄마. 우리 어차피 아빠도 없잖아. 엄마가 연애한다고 한들 내가 말리겠어? 나도 다 컸는데 그런 걸 왜 숨겨."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대체 뭐냐고! 내가 분명히 다 들었다고!"
혜정은 엄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사실 예전에도 혜정이 자고 있을때 잠겨 있던 엄마의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얼핏 소리도 들렸던 걸 기억한다. 그때는 잠결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상하긴 했다. 엄마는 대체 누구랑 있었던 걸까.
"빨리 말하라고! 저번에도 그랬잖아! 내가 모를 줄 아냐고!"
"하..."
그날이었다. 엄마는 혜정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서. 엄마의 말이 혜정의 귓전에서 튕겨져 나가는 듯 했다. 귀가 멍하고 머릿속이 아득했다.
바깥 세상은 4강 신화를 축하하는 사람들의 퍼레이드로 여전히 웅웅 시끄러웠다. 말도 안 되는 날,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