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는 송한의 매니저가 사다놓은 수입산 과일과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 매니저가 아까 SSG에서 나온 거야. 오늘 우리 오랜만에 이렇게 뭉쳤으니, 먹고 마시자! 고생했어들! "
송한은 와인 셀러에서 와인과 양주 몇 병을 꺼내왔다. 얼핏 봐도 비싼 것처럼 보였다.
술자리 겸 식사자리가 무르익었다.
한강 전경이 통창으로 시원스럽게 보이는 송한의 다이닝룸은 여느 레스토랑 부럽지 않게 고급스럽고 멋졌다. 부러움 반, 감탄 반으로 야경을 바라보며 한 잔, 한 잔 기울이다 보니 홍주는 벌써 양주를 꽤 여러 잔 마셨다.
"야. 송한아. 화장실 어떻게 가야되냐."
"저기...복도 끝 따라가서 왼쪽으로 틀면 있어. 그게 제일 가까워."
송한도 취했는지 혀가 꼬부라졌다.
시간이 그닥 많이 흐른 것 같지도 않은데 다들 취기가 꽤 올라있었다.
이미 한 멤버는 식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오랜만의 촬영에 다들 피곤했으리라. 홍주는 복도를 따라 화장실을 찾았다.
'차암 길기도 하다'
홍주는 송한이 말해준 대로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 끝에서
왼쪽으로 틀어 겨우 화장실을 찾았다.
볼일을 보고, 술도 깰 겸 물로 세수까지 하고 나왔다. 얼굴에 찬물이 닿으니 정신도 번쩍 들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다이닝룸에서 돌아 가려는데 아까 그 드레스룸이 보였다. 홍주가 복도 끝에서 슬쩍 다이닝룸 쪽을 보니, 송한과 멤버들의 취한 목소리만 시끄럽게 웅웅 울릴 뿐,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홍주는 이쪽으로 아무도 오지 않는 걸 확인한 후, 몰래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다시 봐도 멋진 드레스룸이었다. 이번 시즌 옷들이 택도 안 뗀 채, 걸려 있었다. 옷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방 한가운데 아일랜드장으로 시선이 꽂혔다.
'딱 한 번만 차봐야지'
홍주는 아일랜드장 맨 윗 서랍을 조심스럽게 드르륵 열었다. 송한이 차곡차곡 모아온 컬렉션들이 눈부시게 빛났다. 홍주는 그 중 아까 송한이 풀어 두었던 까르띠에 시계를 왼쪽 손목에 차 보았다.
'이야. 이것도 멋지네'
감탄이 나오는 자태였다. 홍주의 손목에서 시계가 영롱히 빛나고 있었다.
"야 김홍주! 화장실 못 찾았냐? 안 오고 뭐해!"
그때였다.
송한의 목소리가 꽤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다급해진 홍주는 시계를 풀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마음이 급한 탓인지 잘 풀어지지 않았다. 아까 찰 때는 자석처럼 홍주의 손목에 와서 찰싹 잘도 감기더니, 이제는 꿰매놓은 것 마냥 딱 붙어서 잘 풀어지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김홍주!!"
홍주는 일단, 아일랜드장 서랍을 황급히 닫았다. 급한 대로 시계가 안 보이게 후드티 소매를 내려 왼쪽 손목을 가렸다.
송한이었다.
"야 여기서 뭐해"
송한이 드레스룸에 멀뚱히 서 있는 홍주를 보며 물었다. 취했는지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아...화장실 다녀오다가 순간, 여긴 줄 알았어. 아...나 취했나 하하"
"크크. 야 우리집이 좀 크긴 하지. 처음 온 사람들은 꼭 길 잃어. 크크크. 야 나 화장실 간다. 가서 애들하고 마시고 있어"
"어..어"
송한은 드레스룸을 지나쳐 아까 홍주가 갔던 그 화장실로 들어갔다.
'휴...들킬 뻔 했네. 갖다 놔야지'
홍주는 후드티 소매를 다시 올려 시계를 풀고 있었다. 그때였다.
홍주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을 떠보니 홍주는 혜정의 옷장 안에 와 있었다!
"아니. 아니. 잠깐만...이게 무슨, 이게 무슨 일이야?"
"오늘 10시에 보자고 했었잖아 아까"
시계를 보니 밤 10시였다.
아! 그랬다.
아까 분명 첫번째 촬영이 끝나고 홍주는 dm으로 혜정에게 오늘 밤 10시에 보자고 했었다. 그런데 혜정의 답장이 늦어지자, 기다리던 홍주는 혜정의 답을 미처 확인도 못 한 채 매니저에게 휴대폰을 반납했었다. 그리고 두번째 촬영에 임했는데 촬영이 생각보다 길어졌고, 그 사이 홍주는 휴대폰 배터리가 닳아 혜정의 답장을 확인하지 못 했다.
그 후 혜정과의 약속도 완전히 잊어 버렸다.
"와...이거 어쩌지"
"왜?"
"아니. 나 지금 송한이 집에서 멤버들이랑 한잔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걔 시계를 한 번 차봤는데 그 순간 너가 딱 불러냈어 날. 지금 나 걔 시계 차고 있다고!"
홍주는 소매를 걷어 혜정에게 시계를 보여 주었다.
"어머...어떡해..."
"와...타이밍 진짜...어떡하지..일단 휴대폰 충전 좀 하자"
홍주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혜정의 침대 옆 충전 케이블에 꽂고 전원을 켰다.
"아...진짜 어떡하지. 나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완전 잊어버렸어."
"아..."
잊어버렸다...
이 말 한 마디에 혜정은 또 가슴이 쿵, 서운함이 밀려왔다. 설레서 기다리고 있던 자신이 초라해졌다.
그때였다.
전원이 켜지기 무섭게, 홍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송한이었다.
"야! 너 어디야!"
송한은 잔뜩 취한 목소리였다. 멤버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야 김홍주 어디냐고. 먼저 가기냐 치사하게. 우리 오늘 재결합 얘기도 해야지"
'다들 단단히 취했네'
홍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송한에게 말했다.
"아 미안. 속이 너무 안 좋아서 너 화장실 간 사이에 집에 왔어"
"에? 진짜?"
"어..미안"
"엥? 야 우리 여기 계속 있었는데 너 지나가는 거 못 봤는데?"
송한은 아마 스피커폰으로 통화하고 있는 듯 했다. 한 멤버가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네가 너무 취해서 못 들은 거야. 내가 집에 간다고 했잖아"
"엥? 진짜? 그랬나?"
"그래. 작작 좀 마셔라. 우리 이제 30대야 이것들아. 예전같지 않아"
"아이씨. 야 치사하게. 다시 와! 너네 집 우리집에서 가깝잖아. 수현이한테 다 들었어."
"나 오늘은 쉴래. 나 휴대폰 배터리가 진짜 없어. 끊는다 또 보자"
홍주는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어쩌려고 그래."
"됐어. 오늘 하루종일 짜증났는데 송한이 이 놈 골탕 좀 먹이게. 이 시계 당분간 내가 차고 다녀야지."
"송한이가 아끼는 거라며. 없어진 거 금방 들통날 텐데"
"내가 가져간 거라는 증거도 없잖아. 너도 아까 시끄러운 거 들었겠지만, 지금 송한이 집에 6명이나 있어. 다들 술도 엄청 취했고. 누가 훔쳐간 건지, 아니면 술 먹고 자기가 다른 데 둔 건지 어떻게 알겠어. 똥줄 좀 타게 하다가 슬쩍 걔네 집 근처에 떨어뜨려 놓지 뭐."
"괜찮겠어?"
"괜찮아. 괜찮아. 야 그보다 우리 진짜 오랜만에 만났잖아. 우리 볼 일 좀 있지 않아?"
홍주가 방의 불을 껐다. 홍주의 손길이 혜정의 얼굴에 닿았다. 가라앉았던 혜정의 가슴이 다시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천천히, 다시 또 그를 향한 마음이 커져갔다.
풀썩.
침대 위로 두 사람이 포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