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오늘은 [중국 음식 중국 문화] 매거진에 글을 올릴 차례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6.28) 발행된 @강경 작가님의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를 읽고, 내가 예전에 썼던 <미싱 & 미싱 : 재봉틀과 미싱 사이>라는 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강경 작가님의 관심사는 우리 사회의 폭력과 부조리, 모순과 갈등 문제의 해소다. 이번 글도 마찬가지. 2024년 6월 24일에 발생한 화성 리튬배터리 공장 폭발 사고를 다루었다. 이번 사고 역시 노동자들의 생명을 경시한 안전 불감증에서 비롯된 인재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님의 창작 의도에 깊이 공감하며 조금이나마 호응해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60년대 미싱 노동을 소재로 썼던 글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이날 사고로 숨진 스물세 분의 영령께 깊은 애도의 마음을 표한다.
▶◀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부디 이제라도 편히 쉬소서... ㅠㅠ ▶◀
재봉틀 ― 근대화 사회, 신여성의 상징
“전국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 재치문답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1960년대 일요일 오후가 되면 전 국민의 귀는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 집중되었다. “먼저 같은 글자를 3번 사용해서 문장 만들기입니다. 홍일점 이경희 박사님부터 시작해 주시죠.” “저는 ‘강’으로 하겠습니다. 저기 계신 ‘강’ 선생님 집의 ‘강’아지는 ‘강’ 선생님 똑 닮았다.” 즉흥적인 재치에 인산인해의 공개방송 장내는 폭소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울려 퍼졌다.
그 시절에 대한민국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당시 인기 가전제품은 두 가지. 비교적 저렴한 라디오와 고가高價의 재봉틀이었다. 그런데 60년대 후반 우리나라 재봉틀의 대중적 보급은 어찌 보면 바로 그 라디오 프로그램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 방송에 고정 출연하며 장안의 최고 인기 여류 명사가 된 수필가 이경희가, 그 무렵 우연한 인연으로 미싱자수학원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생계를 위한 것이라서 처음에는 창피하여 숨겼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내 ‘여성 전문기술인 양성’이라는 대의명분을 찾아낸 그녀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고, 매스컴은 이에 호응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해 주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여기저기 학원이 생기고 재봉틀의 수요가 급증했다. 재봉틀이 전문기술을 보유한 ‘우리나라 신여성의 동반자’로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대한민국만이 아니었다. 재봉틀은 전 세계적으로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재봉틀은 산업혁명의 산물이다. 17세기 중엽, 방직기가 발명된 후 섬유산업은 나날이 발전해 갔다. 하지만 바느질은 여전히 수작업 단계여서 발명가들은 재봉틀을 개발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1790년 영국의 세인트(T. Saint)가 초보적인 수준의 재봉틀을 발명한 후로, 여러 발명가들의 노력으로 재봉틀은 19세기 초에 정식 제품으로 탄생한다. 그리고 19세기 중엽에는 재봉틀을 제조하는 여러 회사가 등장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시장 장악력을 보여준 회사는 싱어사(I. M. Singer & Company)였다. 초창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재봉틀은 거의 모두 싱어사 제품. ‘싱어’라는 브랜드가 바로 ‘재봉틀’을 의미했다. 품질이 가장 우수해서가 아니었다. 더 뛰어난 품질의 다른 회사 제품도 많았다. 그러나 싱어사는 비즈니스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레전드적인 마케팅 기법으로 세계 최대의 재봉틀 제조회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어떤 마케팅 전략이었을까?
첫째, 여성 공략. 다른 회사들의 타깃은 ‘공장’과 ‘남성’이었다. 여성은 아직 노동 시장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싱어사는 획기적으로 ‘가정’과 ‘여성’을 타깃으로 삼았다. 당시 서구에서는 아르누보적인 나른한 분위기의 요정이나 매춘부 스타일의 여성상이 유행하고 있었지만, 싱어사는 대대적인 포스터 광고로 ‘싱어 걸(Singer Girl)’이라는 새로운 이미지의 여성상을 만들어냈다.
심플한 드레스를 입은 자신만만하고 자유로운 모습. ‘싱어 걸’은 고생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당당한 소비자이자 생산자였다. 싱어사는 재봉틀 판매에 앞서, 먼저 시대를 앞서가는 세련된 ‘신여성’의 이미지를 구축한 것이다. (상, 하 사진: 네이버 지식사전, <재봉틀> 참고)
싱어사는 동시에 호화 가구나 고급 실내장식품으로도 손색이 없는, 예쁜 디자인의 가정용 소형 재봉틀을 주력 제품으로 생산했다. 그리고 상류층 여성을 대상으로 50% 세일을 실시했다. 이 기계가 가사노동의 부담을 얼마나 줄여주는지, 여성의 삶의 질을 어느 정도로 향상해 줄 수 있는지, 상류층 여성이 주도하여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게 유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중산층에게는 여전히 고가였다. 그래서 채택한 방법이 할부제도. 소액의 선수금만 내면 즉시 물건을 건네주고 나머지는 장기간에 걸쳐 분납하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방식이었다. 수금할 때 자연스럽게 교육 겸 AS까지 해주니 금상첨화! 여성들의 반응이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둘째, 해외 공략. 싱어사는 해외시장, 특히 낙후된 국가를 적극 공략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신기술을! 문명의 이기를 전 세계에 전파하자!” 싱어사의 슬로건은 시대적인 방향성과 부합하여 대 성공을 거두었다. 20세기 초에는 아프리카의 오지와 동방의 은둔 국가 조선에도 지사를 설립하는 등, 전 세계 재봉틀 시장의 90%를 석권하게 되었다. 싱어 재봉틀은 세계 최초로 대량 판매된 가정용 기계이자 표준화된 기계로써, 근대화와 문명의 상징이 된 것이다.
1870~1900년 경, 싱어사의 트레이드카드 세트 ‘세계 곳곳의 싱어 재봉틀’ 가운데 ‘Korea’. 출처 : Boston Public Library.
바느질은 많은 시간, 엄청난 끈기와 노력이 요구된다. 20세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거의 모든 여성들은 그 중노동을 매일같이 무한 반복해야만 했다. 그런데 재봉틀이란 최첨단 테크놀로지 상품이 나타나 우리의 할머니들을 그 끔찍한 가사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것이다. 게다가 고급 실내장식품으로 마음의 벗이 되어주기도 하였으니, 얼마나 좋으셨을까.
할머니나 어머니께서 혼수품으로 장만해 오셨다는 어여쁜 디자인의 재봉틀. 정갈한 방 한 구석에서 조용히 세련된 이미지를 뽐내던 재봉틀. 우리들의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매일같이 정성껏 기름칠하고 천으로 닦던 재봉틀. 손때 묻은 그 재봉틀은 우리들 할머니와 어머니, 그분들의 분신이었다. 대한민국 근대화의 세월이었다.
미싱(missing) 미싱(machine)!
지나가버린 시절, 그리운(missing) 재봉틀(machine)….
미싱 & 미싱 – sewing machine과 machine사이
재봉틀과 미싱은 같은 뜻이다. 영어로는 sewing machine. 일본인들은 그냥 machine, ‘미센’이라고 불렀는데, 이 땅에 건너오면서 다시 ‘미싱’으로 변신한 것. 그러나 약간의 뉘앙스 차이는 있다. 엄격하게 경계를 구분할 수는 없지만, ‘재봉틀’은 대체로 가사와 취미/부업으로 활용하는 가정용이고, ‘미싱’은 치열한 산업전선에서 사용했던 공업용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이 재봉틀과 미싱의 사이를 넘나들며 희로애락,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셨다. 스마트한 신여성들은 사업상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앞에서 거론된 수필가 이경희가 삼호미싱자수학원을 운영한 것이 좋은 사례다. 그러나 무일푼이었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한평생 공업용 미싱을 부여잡고 말할 수 없이 고된 삶을 살아갔다.
“백정란(30) 여사는 3년 전부터 미싱자수에 착안했다. 삼호미싱자수학원에서 2개월(하루 4시간) 강습을 받고 미싱 1대로 2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이제는 미싱이 5대. 일이 밀리고 있다. 삼호미싱자수학원장 이경희 여사는 하루에 서너 시간 수를 놓아 싼값으로 팔아도 1만 5천 원 정도는 거뜬히 벌 수 있다고 말한다.”
1981.11.25일 자매일경제신문에는 또 이런 기사가 실린다.
“서울 인사동에서 현대침구사를 경영하는 백정란 씨는 미싱자수로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 백 씨는 독특한 아이디어로 고객의 호응을 받아 현재는 빌딩 주인이 됐으며 리조 침구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14년 사이에 미싱 사업으로 성공한 또 한 명의 스마트 신여성 탄생의 스토리다.
1967년은 박정희 정권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던 해다. 가발과 봉제산업으로 10억 불 수출 달성이 목표였다. 때마침 미싱의 국산화에도 성공하여 봉제공장마다 부라더미싱이 줄지어 배치되었다.
그해 평화시장 미싱 시다 월급은 평균 1,000원.2020년 기준으로는 약 3만 1천 원이다.(한국은행 화폐가치계산법) 근무조건은 하루 16시간 노동. 한 달에 2일 휴식. 16시간 ×28일=448시간이므로,시급으로 치면 67원이다.(2020년 비교기준 환산액. 이하 동일 계산법 적용). 참고로 1970년 짜장면 1그릇은 100원, 버스요금은 10원이었다.
백정란 씨는 어떻게 미싱으로 돈을 벌어서 빌딩을 살 수 있었고, 평화시장 시다 여성은 왜 한 달에 448시간 동안 미싱을 끼고 살았어도 짜장면 10그릇 값밖에 못 벌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기초 자본의 투자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당시 쓸 만한 미싱은 약 5만 원(150만 원). 백 씨는 그 미싱을 5대 구매했다. 학원 수강비, 재료비, 임대료까지 합치면 대충 1,000만 원 정도 투자한 듯. 출발선상의 이 차이가 극심한 양극화의 결과로 이어졌던 것은 아닐까.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봉제공장 재단사로 일하던 22살의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면서 분신자살했다. 그가 뿌리고 간 ‘삐라’를 주워서 읽어보자.
<탄원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2만여 명. 대부분 여성. 평균연령 18세. 하루 16시간 작업. 한 달에 이틀 휴식. 시다(수습공)는 평균 15세. 급료는 한 달 평균 2,700원.(2020년 기준 56,700원. 시급 126원) 20평 밀폐공간에 25명 단체숙식. 거의 모두 안질,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과 폐결핵을 앓고 있다. 제발, 제발 근로기준법을 지켜 달라! (2020.10.28. 한겨레 기사 참고)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중 분신 장면. ⓒ 영화 전태일 제작위원회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흐른 뒤의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1981.11.25. 일자 매일경제신문의 기사를 토대로 정리해 보자. (1981년 1만 원은2020년의 약 39,000원)
“미싱자수학원은 서울에 8개소가 있으며 지방에는 아직 없다. 수강료는 월 2만 7천 원. 재료비 5만 원 별도. 2~3개월의 기초과정을 끝내면 부업을 시작하거나 취업을 할 수 있다. 경력 6개월 미만의 초보자는 월 15만 원(585,000원),1년 이상은 월 20만~30만 원(78~117만 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하루 10시간 작업 기준)
기능공으로 취업하면 초임은 월 10만 원(39만 원), 숙련공은 20만 원(78만 원) 이상을 받기도 한다. 직접 미싱을 돌리지 않고 가내부업을 할 수도 있다.
약 1백50만 원(585만 원)을 투자하면 중고 미싱 3~4대를 살 수 있고, 기능공을 두고 운영하면 월 50만 원(195만 원) 안팎의 수입이 기대되므로, 자본에 비해서 수익성이 꽤 높은 편이다.”
1983년. 그해의 1만 원은 2020년의 35,460원. 평화시장 미싱 시다 월급은 8만~9만 원(28~32만 원), 미싱보조는 10만~15만 원(35~53만 원). ‘오야’가 되면 25만 원(88만 원) 수준이었다. 근무시간은 하루 14시간. 십여 년 전보다 2시간 감소. 휴일은 마찬가지로 한 달에 두 번. 시다의 시급은 14시간 ×28일=392시간, 월평균 30만 원÷392시간이므로 765원이다. 67년에 비해 11.4배.짜장면 값은 67년보다 10배인 1,000원. 결국 생활수준은 10년 전과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미싱’은 여성의 유휴노동력을 사회노동력으로 전환시켜서 국가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미싱노동으로 얻을 수 있는 열매는 가혹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설령 시드머니의 가치를 최고로 높게 쳐주고, 무일푼으로 출발선상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숙명을 인정한다고 해도….
미싱 & 미싱. 재봉틀(sewing machine)과 미싱(machine)의 사이에 존재했던 그 슬픈 수확의 간극. 그 속에 어른거리는 시대의 억압과 제도적 착취의 그림자…,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받았던 여성노동자들의 고단했던 삶…, 갈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이 되어 우리들 마음속에 한 잎 두 잎 날아온다.
후기
2024년,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50인 미만 5인 이상 사업장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또 어처구니없는 안전 불감증으로 스물세 명의 소중한 생명이 사라졌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자꾸만 재발되는 걸까. 나라에 충성하고 민족에 봉사하라고 군에 보낸 소중한 자식들이 죽었다. 그런데 그 진상을 밝히고 추후 재발을 방지하자는 국민 대다수의 요구를 최고 권력자가 묵살해 버리니, 누가 법을 지키려고 하겠는가!
이번 사고의 희생자는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 양극화는 점점 심화되고 있는데 이젠 거기에 외국인 노동자 문제까지 더해졌다. 급격한 인구 감소 탓에 대통령이 국가 위기까지 선언한 마당이니, 이제 그들이 없으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처지다. 그런데도 정부 여당 일각에서는 앞으로 그들에게는 그 알량한 최저 임금마저 적용하지 말자는 논의가 일고 있단다. 앞으로 중대재해를 계속 일으키자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노예 취급, 짐승 취급도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 시급한 일은 과연 무엇일까. 무슨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렵다. 모르겠다. 고민된다. 강경 작가님의 문제 제기가 새삼 반가운 이유다.
참고
소오생, <미싱 & 미싱 : 재봉틀과 미싱 사이>는'공간칠'의 발행인 김민혜 작가의 의뢰를 받아, 광장시장을 소재로 한 무크지 '을지로 르포 제2탄' 《체험, 삶의 광장》에 실은 글이다. (2021. 10 발행) 참고 삼아 여러 작가님들에게 이 무크지를 잠시 소개해드릴까 한다. ('을지로 르포 제1탄'은 이 시대 마지막 지게꾼의 눈을 통해 방산시장을 다룬 《첩첩 방산》이다.)
《체험, 삶의 광장》은광장시장의 어떤 이야기를 다룬 것일까? 빈대떡, 육회, 마약김밥 먹방 이야기일까? 아니었다. 주단부綢緞(silk)의 논스톱 한복 제작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였다.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 모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그 등장인물들이 입고 있던 한복들. 임금님이 입으신 곤룡포에 수 놓인 용, 신하들 옷의 학과 호랑이, 대군들 의복의 기린과 거북... 어디서 누가 만든 것일까? 그 아름다운 꾸밈의 세계를 치열하게 만들어내는 곳. 그곳이 바로 광장시장의 주단부라는 것이다.
지금은 먹거리에 가려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광장시장의 예전 핵심 품목은 '포목'이었단다. 당연히 그와 관련된 다양한 업종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전문성을 구축한 업종이 바로 주단부. 저렴한 가격에 멋들어진 수제 한복이 일주일이면 뚝딱 만들어지는 논스톱 한복 제작 시스템이 이곳에 구축되어 있었단다.
광장시장의 한복 제작공정은 [ 원단 구매 - 재단 - 나염 - 자수 - 재봉 - 금박 - 마무리 ] 등의 단계를 거치는데, 신기하게도 이 모든 공정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유기적으로 착착 굴러간단다. 누가 관리 감독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시스템이 구축되었을까? 을지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커뮤니티 아티스트 김민혜 작가의 참여 관찰에 의하면, 그 기술력은 스위스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를 제조하는 장인들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이 무크지를 발행하게 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 멋진 한복 제작 시스템이 급격하게 무너져 소멸 직전에 있기 때문이었다. 원인은 크게 세 가지. (1) 생활 습관의 변화. (2)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 생산과 컴퓨터 자수의 출현. (3) 코로나로 인한 수요 감소.
특히 자수의 밑그림 역할을 하는 '나염 찍기' 공정이 문제였다. 이 공정이 시스템의 핵심인데, 그 많던 나염 기술자가 모두 사라지고 마지막 나염 기술자 권기현 사장님, 딱 한 명만 남았다는 것. 그런데 이 분도 최근 생계를 위해 투잡을 뛰면서 시스템에 공백이 생겼다는 것이다.
내가 김민혜 작가의 원고 요청에 응한 것은 오랜 인연 때문이 아니었다. 정성 때문이었다. 그녀가 권기현 사장님의 도제가 되어 '나염 기술'을 배우겠다고 나선 것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그 전통 기술을 보전하고 아카이빙하기 위해, '정통파 화가'로서의 길을 제쳐놓고, 불볕더위에 매일 광장시장 꼭대기의 한증막 작업실에서 구슬땀을 흘린다는데, 그 시스템 속에 뛰어 들어가 소멸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늦춰보겠다는데, 차마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그래서 무크지 제목도 《체험, 삶의 광장》이었구나, 알게 되었다.
아래는 결과물 전시회
김민혜 작가가 내일부터 또 다른 전시회를 가진다고 한다. 재개발 중인 을지로 곳곳에 붙어있는 살벌한 구호들을 해체하여 예쁜 비단 위에 재탄생시키는 작업이란다. 예쁘게 재탄생한 구호들이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소통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빠, 언제 와? 이번엔 오전 개관할 때 오는 게 좋을 것 같애."
'노동 예술가' 소리를 듣는 괴짜 백수 아티스트의 백수 아빠의 아빠 노릇...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