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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Nov 16. 2024

13. 천년의 이별 노래

유영, <우림령, 한선처절> 낭송과 감상

 오늘 소개하는 노래는 무려 일천 년 동안이나 중국에서 가장 유행했던 이별의 노래다. 중국뿐만이 아니다. 《고려사악지 》에도 수록되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옛날이야기만도 아니다. 오늘날에도 이 노래를 모르는 중국 사람은 거의 없다. 통계는 없지만 중국의 식자층과 일반대중을 막론하고 아마도 가장 사랑하는 고전 유행가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오늘 일천 년 동안 동아시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이 이별 노래의 매력을 제대로 알아보자. 그러려면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먼저 기본 상식 몇 가지를 알아두어야 한다. 이 나이에 또 뭘 자꾸 배우란 말인가,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말고 동아시아의 옛 것에 대해 조금만 더 이해의 폭을 넓혀보자.


우리의 전통문화와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니, 조금 생소한 이야기라도 잠깐만 꾹 참고 들어보시라. 익숙해지면 이런 이야기도 의외로 상당히 재미있다. 사연이 조금 길지만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다.





작품 해제



(1) 이 작품의 장르는 '사詞'다.

'사'의 발생과 변천 등에 대해서는 <12. 마음속에 떨어지는 낙엽의 詩語>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2) '사'를 쓰는 행위는 '작사作詞'라고 하지 않고 '전사塡詞'라고 했다. '전塡'은 '메꾼다, 채워 넣는다'는 뜻.

'작사'라고 하면 '진지한 창작 행위'의 뉘앙스를 풍긴다. '전사'라고 하면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정도의 글장난의 뉘앙스가 된다. 그런데도 왜 '전사'라고 했을까?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문인들은 '글(文)'이란 사회의 공익을 위해서 쓰는 것이고, '시'는 개인의 고상한 정서 함양을 위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사'는 주로 자기가 사귀는 기녀에게 선물하는 용도로 쓰는 것 아닌가. 그걸 '진지한 창작 행위'로 내세우기에는 민망한 일로 여겼을 게다. '전사'란 단어는 '사'에 대한 당시 문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용어다.


'사'에 대한 편협한 인식을 타파한 사람은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진정한 자유인, 소동파였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3) '사'는 '시詩'와 달리 제목이 없다. 여기 이 <우림령 雨霖鈴>도 이 작품의 제목이 아니라, 예전부터 존재해 내려오던 '멜로디 이름'이다. (전문 용어로 '사패 詞牌'라고 한다.) 따라서 많은 문인들이 이 <우림령> 멜로디에 맞춰서 가사를 썼다. 그리고는 다른 작품들과 구별하기 위해 작품의 맨 처음 네 글자를 '사패'의 뒤에 함께 병기했다. <雨霖鈴, 寒蟬凄切> ☜ 이렇게.





(4) '우림雨霖'이란 줄기차게 내리는 '장마 비'라는 뜻이다. '령鈴'은 '방울 소리'라는 뜻이다. 이 멜로디의 사패를 <우림령>이라고 한 것에는 구슬픈 사연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안녹산의 난을 만난 당나라 현종 시절. 현종은 분노한 군사들에게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 양귀비를 희생양으로 내어주고 가슴이 찢어진 채 서촉 땅으로 도망을 가는데... 그 마음을 하늘도 알아주는지 열흘이 넘게 장마 비가 추적추적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방울 소리... 양귀비가 오는 소리 아닐까, 자기도 모르게 얼른 고개를 돌려본 현종은 이내 현실을 깨닫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통곡하고 말았단다. 그때 만들어진 노래가 이 <우림령>이라는 것.


혹자는 현종이 작곡한 것이라는데 믿을 수 없다. 당 현종은 음악에 대단한 재능이 있어서 수백 명의 악공들이 연주하다가 누군가 반음이라도 틀리면 귀신 같이 알아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귀가 있다고 해서 직접 작곡했다는 법은 없다. 교방敎坊의 전문 악공들이 현종을 위해 작곡했을 가능성이 크다.


교방敎坊이란 당나라 때부터 음악을 관장했던 부서의 이름이다. 특히 미모의 여성 악공樂工들에게 음악과 무용 등의 예술을 훈련시켰다. 그러다가 중당 시대의 순종順宗 임금 때, 정권을 장악한 왕숙문王叔文 유종원柳宗 등이 개혁의 일환으로 그 여성들을 모두 궁궐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이 조치는 기녀 문화가 흥성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연히 '사'의 흥성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잠깐, 참고로 알아두자. '기녀'는 원래 ''라고 표기했다. '재주 많은 여인'이라는 뜻. 그러다가 점차 '妓女'로 표기하면서 '웃음을 파는 여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5) 이 작품을 지은이는 중국 북송 시대의 유영柳永(984~1053)이다. 본명은 삼변三變. 산동성 임기臨沂에서 태어났지만 복건성 무이산이 원적原籍이다. 당시는 북송이 가장 잘 나가던 시기라서, 대도시가 발전하고 상업이 번창했다. 덩달아 기녀문화도 크게 흥성했음을 상식으로 알아두자.


북송 장택단張擇端(1085~1145)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일부. 청명절을 맞아 북송의 도읍지인 변경(개봉)에서 인파가 붐비는 모습을 생동감 넘치게 포착했다. 당시의 여러 가지 풍속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후세의 많은 모방 작품이 있다. 24.8cm × 528.7cm의 대작으로 중국의 국보다.  




유삼변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장 실력은 물론이요 음률에도 밝아서 노래도 잘 부르고 악기 연주도 잘했다.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의 자질을 타고났으니, 21세기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면 전 세계를 주름잡는 한류 문화의 아이돌이 되었을 게 틀림없다.  


그는 청년 시절에 과거 시험을 보러 복건에서 도읍지인 변경汴京(오늘날의 개봉開封)으로 올라오다가 항주杭州를 지나게 된다. 그곳에서 유삼변은 번화한 도시의 화려한 기녀 문화를 접하고는 홀라당 눈이 뒤집혀 2년 간을 기녀들과 어울리며 지내게 된다. 아, 맞아. 내가 지금 과거 시험 보러 가는 중이었지? 2년 만에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그는 어렵사리 항주를 떠나 소주蘇州로 북상한다.


그런데 소주와 항주가 어떤 곳이던가?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은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 上有天堂, 下有蘇杭" 아낌없이 찬사를 늘어놓는 바로 그곳 아니던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사랑이 고픈 소주 기방의 아리따운 기녀들이 젊디 젊은 우리의 풍류 가객 유삼변을 어찌 그냥 보내겠는가?


항주에서도 소주에서도 유삼변은 기녀들에게 최고의 손님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허여멀건 외모의 젊은 청년이 노래 잘 부르지, 악기 잘 타지, 게다가 즉흥적으로 멋들어지게 작사 작곡까지 하니 유삼변은 어느새 수많은 기녀들이 흠모하는 인기 초절정의 스타가 되고 말았다. 그가 만든 노래는 기녀들의 뜨거운 호응으로 나오는 족족 대중에게 빅 히트를 쳤다.


그렇게 또다시 몇 년을 보내고 나서 유삼변은 북송의 수도인 변경(개봉)에 올라와 세 번의 과거 시험을 보지만 모두 낙방한다. 변경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사대부 계층이 그를 보는 눈은 싸늘하기만 했다. 지식인들은 그를 늘 기녀들과 어울려 세월만 축 내는 '기생 오래비' 정도로 인식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개봉(변경). 그림이 아니라 상공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개봉은 일천 년 전 도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판관 포청천>이 활약한 도시다. 참 아름답다. 가보시라.




1024년,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된 유삼변은 네 번째 과거 시험에서도 낙방하고 만다. 실혼낙백失魂落魄, 멘털이 완전히 붕괴된 유삼변은 자신을 버린 개봉이라는 도시에 한시라도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어디론가 정처 없이 유랑의 길을 떠나려는 바로 그 순간, 소식을 듣고 황망히 달려온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와의 이별 노래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천 년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애창되고 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할 이 작품, <우림령, 한선처절>이다.






(6) 후일담. 유삼변은 1034년, 나이 오십에 드디어 과거에 급제했다. 너무나 기뻤던 유삼변은 그때의 그 기쁨이 영원하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영원할 영永'으로 바꾸어 유영이 되었다.


그러나 '기생 오래비'라는 세간의 인식은 끝끝내 그의 출세를 막았다. 유영은 지방 작은 고을의 현령으로 지내다가 6품관 벼슬을 끝으로 관운이 다하고, 1053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안타깝게도 남긴 재산 한 푼도 없었고 장례를 치러줄 사람 한 명도 없었다.


소식을 접한 기녀들이 발을 벗고 나섰다. 모금 운동을 벌여 융숭한 장례를 치러줬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통 역사책에는 북송 최고의 유명 인사였던 유영柳永의 전기가 없다. 그는 사회의 주류 문화 집단에게서 철저히 배척당한 것이다.






(7) 그는 '사'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유영 이전의 '사'는 짤막한 '소령 小令' 위주였다. 쉽게 말해서 짧은 1절 가사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영은 자신의 놀라운 음악 재능으로 '만사 慢詞'를 창작했다. '만사'란 2절까지 이어지는 장편의 가사를 말한다.


예컨대 <우림령> 원래 멜로디는 짧은 소령이었으나, 유영의 <우림령, 한선처절>은 2절까지 가사를 만들고 그에 어울리는 멜로디로 편곡한 만사였다. 이로써 '사'는 또 한 단계 위로 발전하였고, 유영은 송대 '사'의 완약파婉約派대표하는 사인詞人이 되었다.


유영이 편곡한 당시의 오리지널 멜로디는 전해지지 않는다. 오늘날 이 노래는 옛날과 반대로 가사는 유영이 작사한 것 하나로 통일 되었지만 멜로디는 여러 명이 작곡한 것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중에 야오스싼(堯十三: 1986~)이 편곡한 멜로디로 소개해드리겠다.




대부분의 문인들은 심심풀이 땅콩으로 '사'를 썼다. 그러나 유영은 사를 '창작했던' 전문적인 사인詞人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그만큼 대부분의 문인들은 유희 삼아 기녀들과 짧은 사랑을 즐긴 것이고, 유영은 기녀를 '재능을 가진 한 인간'으로 진지하게 대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기녀들이 마음을 다해 합심하여 치러준 그의 장례가 이를 증명해 주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어느 쪽이 인간을 더 사랑한 것일까?



자, 그럼 직접 작품을 감상해 보자. 먼저 1절부터.

(예전에는 1절을 상편上片, 2절을 하편下片이라고 했다.)





[ 1절 번역 & 원문 ]


 


차가운 매미 구슬픈 울음소리 

정자의 그림자 길어지는 저녁 무렵 

소낙비는 이제 막 그치었네


도성 문밖 천막에서 하릴없이 술 비우네

미련만 남은 곳에

뱃사공은 떠나자고 재촉한다


손잡고 마주 보니 눈물 젖은 님의 눈

말 없는 흐느낌에 목이 메일뿐


님 떠나는 천리 길

파도는 안개에 휩싸이고

저녁노을 내려앉는

초나라 하늘은 가이없구나


寒蟬淒切長亭晚,驟雨初歇。

都門帳飲無緒戀處、蘭舟催發。

執手相看淚眼無語凝噎。

念去去、千里煙波靄沉沉楚天闊



<우림령 1절> 한국어 & 중국어 낭송: 소오생



[ 1절 해설 ]


 

1절은 영락없는 영화의 한 장면이다. 네 개의 신이 등장한다.


[ #1-1 ] 맴맴맴맴... 매미가 운다. 그런데 차가운 매미란다. 여름이 다 지나가고 가을이 다가왔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 매미 우는 소리가 처절하게 들린단다. 이별의 찢어지는 마음을 예고하고 있다.


[ #1-2 ] 장정長亭은 송나라 때 10리마다 설치한 역참의 이름이다. 역참은 오늘날의 '정거장'이니 바로 곧 이별의 장소다. 그러나 소오생은 '長亭'을 '길어진 정자의 그림자'라고 번역했다. 그 뒤에 나오는 '저녁 만晩' 때문이다. 저녁 무렵이 되면 사물의 그림자가 길어지게 마련 아닌가.


'사'는 '시'보다도 훨씬 이미지 요소가 강하다. 번역할 때는 문장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이미지를 적절하게 나열하도록 신경 써야 한다. 글자와 어휘는 하나하나 독립된 이미지일 때가 많다. 연속되는 이미지들을 우리말 시어적절하게 치환해야 한다.


'장정長亭'은 '역참'이란 뜻도 있지만, '저녁이 되어 길어지고 있는 정자의 그림자'라는 이미지로 볼 수도 있다. 더구나 맨 앞의 '마주할 대對'라는 글자가 있지 않은가. 그냥 '저녁 무렵의 역참을 마주한다'는 것과 '정자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어진 저녁 풍광을 대하는' 이미지를 비교해 보시라.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시는가.  


[ #1-3 ] 저녁 무렵, 가을을 알리는 소낙비가 이제 막 그쳤으니, 공기는 오죽이나 맑고 신선하겠는가. 그래서 이별은 더욱 슬프다. ('취우驟雨'는 '소낙비'. '초初'는 '방금, 이제 막'. '헐歇'은 '그치다'의 뜻)



[ #2 ] '도문都門'은 '도성 문'이니 여기가 바로 송나라의 도읍지 개봉(변경) 임을 알려준다. '장帳'은 '장막'. 이별의 정거장이니만큼 환송객들과 아쉬움의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장막이 설치된 모양이다. 그곳에서 한 쌍의 남녀는 말없이 술잔을 나누는데, 이제 그만 떠나자고 재촉하는 뱃사공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들의 마음이 어떠할까? 얼마나 황망하고 조급해질까...



복건성 무이산 유영기념관. 손잡고 마주 보니 눈물 젖은 님의 눈. 말 없는 흐느낌에 목이 메일뿐.



[ #3 ] 화면이 클로즈업되어 두 남녀를 비춘다. 서로 두 손을 꼭 잡고 있다. 서로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해도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여러분은 그런 순간을 겪어 보셨는가. 사랑하면서도 이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들...


아니 사랑한다면서 왜 이별을 한다지? 차라리 떠나지를 말던가, 아니면 손 잡고 같이 떠나던가... 소오생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모순의 인생을 다 이해하려고 하지는 말자. 나름대로 뭔가의 사연이 있지 않겠는가.




[ #4-1 ] '떠날 거去' 글자가 두 개 중첩되어 있다. 하염없이 떠나가는 그 모습이 그만큼 더 강조된다. 천리 머나먼 길 떠나는 그 물길에 아련히 물안개가 덮여간다.


그런데 맨 앞에 '생각할 념念' 자가 있다. 멜로디 가락을 맞춰주기 위해 삽입된 글자, 이른바 '영자領字'다. 할 수 없이 끼워 넣은 글자이지만 나름대로의 뉘앙스가 스며 있다. 눈앞에서는 이미 사라졌지만, 두고두고 천리 머나먼 길을 떠나고 있는 님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 #4-2 ] '모애 靄'는 저녁 무렵의 산기슭이나 물 위에 끼는 뿌연 아지랑이/이내 따위를 말한다. '초천楚天'은 '초나라의 하늘'이지만 여기서는 '님 떠나신 남쪽 나라 하늘'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저녁노을 속에 더욱 뿌예지는 아지랑이가 무겁게 내려앉는데, 님 떠나신 남쪽 나라 하늘은 가없이 넓어 보이기만 한다. 그만큼 넓은 곳으로 정처 없이 떠나는 님이니,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다는 말이겠다.  




맴맴... 이별의 버드나무에서 구슬피 우는 매미 소리.

저녁. 길게 늘어지고 있는 정자의 그림자...

장막 속.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남녀. 침묵... 그렁그렁 눈물 맺힌 눈동자...

배 떠나요~! 한껏 목청 높인 뱃사공의 목소리.

님 타신 그 배는 속절없이 물안개 속으로 사라지는데, 어느덧 무겁게 내려앉은 저녁 공기.   

아득한 남쪽 나라 가없는 하늘...



이만하면 가히 빼어난 카메라 감독의 탁월한 촬영 솜씨 아닌가. 기승전결이 완벽한 서사 속에 가슴 에이는 이별의 정서가 한껏 스며있지 않은가. 과연 천고에 길이 빛나는 이별의 노래라 할 만하다.



그러나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사람들이 이 노래를 사랑하고 애창하는 이유는 1절이 아니라 2절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어서 다음 2절을 감상해 보자.




[ 2절 번역 & 원문 ]





다정한 사람들은

옛부터 헤어짐이 너무 아파

어찌 견딜까

차가운 가을날의 소슬함을


새벽에 술 깨어 일어나니

여기가 어디인가?

버들가지 늘어진 강가

새벽바람에 이지러진 초승달


이대로 이별하여 세월 흘러가면

좋은 시절, 아름다운 풍광

모두가  !


만 가지 그리움 있다한들 

다시 또 누구에게 말해주랴


多情自古傷離別那堪、冷落清秋節!

今宵酒醒何處柳岸曉風殘月。

此去經年是、良辰好景虛設。

便縱有、千種風情與何人說!




<우림령 2절> 한국어 & 중국어 낭송: 소오생




[ 2절 해설 ]


 



[ #5 ] 다정한 사람들은 헤어짐이 너무나 아프단다. 게다가 계절은 왜 하필 그러지 않아도 슬픈 가을이란 말인가. 그래서 최백호도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애절하게 부탁하지 않았던가.


소오생의 인생 18번 노래는 조용필의 <정>이다. 정을 쏟고 정에 울며 살아온 인생이다. 가슴속엔 무지개가 피어날지 몰라도 그 바람에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유영의 가사가 더욱 심금을 파고든다. 다정한 사람들은 헤어짐이 너무 아파/ 어찌 견딜까/ 차가운 가을날의 소슬함을...




[ #6 ] 바로 여기가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다!


역대의 모든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칭송한 장면이요, 이 노래가 천 년 동안 가장 사랑받은 유행가가 된 결정적인 이유다. 6언과 7언의 장단구長短句가 교차되는 가운데, 교묘하게 배치된 6개의 이미지. 그 이미지들을 머릿속으로 연상해 보시라. 서사와 서정이 한데 얼려 낯선 곳을 방랑하는 나그네의 외로움이 절묘하게 부각되고 있다.


(1) 오늘 새벽 今宵

(2) 술이 깨다 酒醒

(3) 응? 여기가 어디지? 何處

(4) 버드나무 늘어선 강가 柳岸

(5) 새벽바람 曉風

(6) 이지러진 조각달 殘月


새벽에 술이 깨어 몸을 일으켜보니, 새벽바람 소슬한데 강가엔 버드나무 하늘엔 조각달이 걸려있다. 갑자기 모든 풍광이 익숙한 듯 또 낯설기만 하다. 여기가 어디지? 난 누구?


독자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으신가? 떠돌이 생활을 많이 한 소오생은 숱하게 많다. 방학이면 늘 배낭 하나 둘러메고 팔천리 드넓은 중국 대륙 구름과 달을 벗하며 여기저기 방랑 생활을 많이 했던 탓이다. 특히 대도시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여기가 어디인지 늘 헷갈렸다. 북경, 상해, 서안, 청도, 연태, 제남, 항주, 홍콩, 광주, 성도, 곤명... 하도 많이 싸돌아 다니다 보니 거기가 거기 같았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난 누구더라?


그런데... 사실은 삶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닐까?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최희준도 노래하지 않았던가.





[ #7 ] 대목은 이미지의 나열이라기보다는 심경을 직접적으로 토로한 것이다. 직역이 가능하다.


此去: 이대로 떠나가면(이별하면)

經年: 세월이 지나가다

良辰: 좋은 시절

好景: 빼어난 풍광

虛設: 헛된 것

應是: 당연히 ~할 것이다.


이대로 떠나가서 세월이 흐르면, 설령 제아무리 좋은 시절 빼어난 풍광을 대한다고 하더라도 다 헛된 것일 게야. 그런 뜻이다.


왜 모두 다 헛될까? 간단하다. 님과 이별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님이 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을 겪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공감한다. 따스한 훈풍에 온갖 화사한 꽃이 다 피어나도, 사랑이 없으면 싸늘한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고엽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 #8 ] 인간의 외로움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가슴속에 쌓인 말을 아무도 들어줄 이 없을 때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 아닐까.

유영은 마지막에 피를 쏟듯 탄식하며 노래한다.


천만 가지 그리운 마음 있다한들

다시 또 누구에게 말해주랴. 


님이 없어서 슬프고 허전한 이유, 바로 때문이 아니겠는가.

브런치와 글벗님들이 하염없이 소중하고 고마운 까닭,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일천 년 세월 동안 이 이별의 노래가 한결 같이 사랑받았던 이유,

바로 그 때문에 슬프고 허전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던 것 아니겠는가!






<雨霖鈴, 寒蟬凄切> ☜ 클릭

▶ 작사: 柳永     작곡: 堯十三   노래: 包美聖   





다음에는 유영의 뒤를 이어 송나라 사의 완약파를 완성한 주방언周邦彦(1056~1121)과 그의 <소년유 少年游, 幷刀如水>라는 노래를 소개해 드리겠다. 미리 말씀드리건대... 이 유행가에는 중국문학사상 가장 은밀하고 에로틱한 에피소드가 얽혀있다. 따라서 다음 글은 39금禁, 40대 이상의 글벗님들만 은밀하게 열어보시기 바란다. 일주일 동안만 공개하고 그 후로는 바로 폐쇄할 예정이니,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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