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 싸움에는 온 우주가 필요하다 [영화]

이해하려 들지 마, 받아들여!

by 지구로

평소 아무런 정보도 접하지 않고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또한 정신 사나운 포스터 하나만 보고 영화관에 갔고, 정신 사나운 전개와 정신 나간 전개에 압도당한 상태로 영화를 즐겼다. 그런데, 후반부에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울고 있었다.


영화를 온전히 이해한 건 아니었다. 그냥 받아들인 것 같다. 조이를 받아들이는 에블린처럼 말이다.


각설하고, 엄마랑 딸이 포옹 한 번 하는 데에 행성이 충돌하는 정신 나간 영화에 대해 떠들어보도록 하겠다.


*

본 오피니언에는 영화에 대한

모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상적인 날선 분위기


에블린은 '빨래방을 운영하는 미국 이민 1세대 중국인 여성'이다. 영수증에서 삶의 굴곡이 보인다는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의 말처럼, 에블린을 수식하는 모든 단어에서 그의 굴곡을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에블린은 매 순간 신경질적이고, 불안정하고, 무례하다. 영화의 초반 에블린과 남편 웨이먼드가 운영하는 빨래방에서의 모든 행동과 대화는 신경질적인 배경음악 위에서 전개되며, 그 일상적인 날 선 분위기는 위태로운 형태로 유지된다. 마치 누구 하나 툭 치면 폭발할 것만 같은 모습이다. 와중에 멀티버스니, 알파 웨이먼드니 어쩌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까지 듣는 에블린은 결국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를 괴물로 인식해 주먹으로 쳐버린다. 사실, 쿠키 한 개면 기분이 풀리는 꽤 단순한 사람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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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상적인 날 선 분위기는 특히 에블린과 딸 조이의 대화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에블린은 조이에게 건강하게 잘 먹고 다니라는 말을 "너 살쪘어."로밖에 말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K-엄마, 아니 C-엄마이다. 미국 이민 1세대 중국인 여성 에블린은 영어에 더 익숙한, 만다린어를 잘하지 못하는, 몸에 타투를 한, 대학을 자퇴한, 여자 친구를 사귀는 조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정확히는, 조이를 이루는 수식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에블린의 첫 기억은 "죄송하지만 딸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을 떨떠름하게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빛이다. 처음부터 자신의 아버지에게 그 자체의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에블린은 자신의 딸에게 아버지와 똑같은 스탠스를 취한다. 조이를 이루는 삶의 수식어 하나하나를 못마땅해하며 '옳지 않다'라고 여긴 것이다. 그런 에블린 탓에 어떠한 '옳음' 안에 있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 조이는 결국 에블린과 멀어지는 길을 택한다. 비록 그 길조차도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에블린이 바라보는 조이의 모습, 조부 투파키


이렇게 에블린이 이해하지 못하는 조이의 수식어가 극대화된 존재가 바로 '조부 투파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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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라인 스톤이 새겨진 벨트와 빨간 스카프가 달린 흰색 점프수트를 입고, 옴브레 핑크 헤어를 하고, 은색 보석 아이라이너와 반짝이 주근깨를 얼굴에 잔뜩 붙인 '엘비스 조부'로서 보여주는 조부 투파키의 첫 등장은 상당히 강렬하다. 반려돼지와 함께 걸어오고, 총을 빨아들여 연기를 내뿜고, 사람을 파티션으로 만들어 터뜨리고, 기다란 딜도를 들고 경찰관을 피떡으로 만드는 조부 투파키의 모든 것은 정신 사납고,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에블린이 조이에게 지금껏 느껴온 이해 불가능한 수식어로서의 모습과도 같다.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의 갈등은 점점 단순한 모녀 싸움을 넘어 삶의 의미와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 차이로 흘러간다. 조부 투파키는 모든 우주를 넘나들며 모든 가능성을 경험한 끝에, "어떤 선택도 결국은 무의미하다."라는 결론에 이른 존재이다. 그에게는 모든 우주가 하나의 가능성일 뿐, 그중 어느 하나에도 절대적인 의미나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면 삶이 편해진다는 조부 투파키의 말은 모든 기존 질서가 해체되고 나면 인간은 어떤 기준도 찾지 못한 채 의미 없음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니힐리즘적 통찰을 보여준다. '옳음'으로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 에블린과 정확히 대립하는 입장이다.


조부 투파키는 아주 일상적인 어느 날, "The Bagel"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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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심심해서 베이글 위에 모든 걸 올렸지.
기분 좋지 않아?
다 부질 없는 거면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괴로움과 죄책감이... 다 사라지잖아.


에블린 또한 조부 투파키가 보여준 베이글을 통해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경험하고, 그의 허무주의적 감각에 동화된다. 동시에 모든 우주에서 모든 에블린은 모두에게 무례하게 굴기 시작한다. 스타가 된 웨이먼드에게 감정 없는 스퀸십을 하려고 하고, 손가락이 핫도그인 디어드리를 뿌리치고, 귀여운 '라따구리'를 식당에서 쫓아낸다.


"Nothing Matters."라는 조부 투파키처럼, 모든 게 부질없다는 듯 말이다.



아는 거라곤 다정해야 한다는 것밖에 없는


놀랍게도, 웨이먼드가 이런 에블린을 구해낸다. 여태껏 웨이먼드의 수식어는 보잘 것 없는, 우스꽝스러운 장난감 눈깔이나 좋아하는, 에블린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이었는데 말이다. 영화는 웨이먼드에게 '아는 거라곤 다정해야 한다는 것밖에 없는'이라는 수식어를 새로 붙여주고, 그의 입을 통해 직관적으로 삶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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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랬지. 세상은 잔인하고 우린 쳇바퀴 돌리듯 살아갈 뿐이라고.
내가 늘 세상을 밝게만 보는 건 순진해서가 아니야.
전략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지.
난 그런 방법으로 살아남았어.


에블린은 웨이먼드를, 웨이먼드의 삶의 전략을, 웨이먼드의 삶의 수식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정해진다.



There are no rules! I'm gonna get you!


비로소 다정해진 에블린은 베이글로 들어가려고 하는 조부 투파키, 아니지, 조이에게 그 모든 옳음을 때려부수고 달려가며 외친다. 그토록 싫어하던 웨이먼드의 장난스러움으로 무장해 총알을 장난감 눈깔로, 모든 폭력을 다정함으로 바꾸면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에블린과 싸우던 점퍼들 또한 회의주의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는다. 에블린이 그들에게 건네준 아주 사소한 행복 덕분에 말이다.


에블린은 조이를 구하러 가면서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한다.


"절 자랑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마침내 전 제가 자랑스러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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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운' 에블린은 조이에게 말한다.


"난 언제까지나 너와 여기 함께 하고 싶어."


에블린이 같은 우주에서 함께 살아가던 조이에게 처음으로 건넨 무조건적인 사랑의 언어이다. 더는 조이가 가진 수식어들-성적 정체성, 외모, 타투, 인생의 방향 등-을 '옳음'이라는 틀 안에 가두지 않고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서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영화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건넨다. 정의란,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하는 냉정한 기준이 아닌 관계를 회복하려는 따뜻한 태도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에블린은 "이게 맞아!"라는 객관적 정의를 택하지 않고, "널 이렇게 사랑하겠어!"라는 주관적인 결단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자신처럼 모든 가능성을 경험한 에블린이 자신에게 다른 길도 있었다고 알려주길 바랐던 조부 투파키의 바람이 마침내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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