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의 휴양림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길을 나섰다. 다소 늑장을 부린 탓에 2시간에 한 대 오는 읍내행 버스를 눈 앞에서 놓치자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다른 정류장을 향해 걷기로 했다.
진도의 버스노선들은 진도대로를 중심으로 가지를 치듯이 뻗어나가는데 내가 묵은 휴양림은 그 중에서도 편도로만 버스가 다니는, 버스가 뜸하게 다니는 축에 속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다른 노선들이 합쳐 간격이 좀더 줄어드는 정류장을 향해 걷기로 한 것이다. 거기까지는 약 5km 정도 더 걸어야 했다. 읍내까지는 대략 18km. 걷기에 익숙한 나인지라 18킬로미터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걸을 수 있었겠지만, 다음 스케줄도 생각해야 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주 후반부터 기온이 올라간 걸 느꼈는데 금요일 진도의 최고기온은 21도까지 올랐다. 밤 기온이 17도라 조금도 쌀쌀하지 않았는데, 이 기온이 더 떨어지지 않고 최저기온으로 유지되어 아침에 길을 나섰을 때에도 18도 정도나 되어 서울에서 속에 입던 긴 티셔츠만 입고 걸었다. 이런 걸 인디언섬머라고 해야 하나. 풀에는 서리 대신 이슬이 맺혀 있었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여름의 기운은 확실히 아니지만, 가을인 듯 가을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봄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렇게 익숙하지 않은 기후를 느낄 때 외국에 온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진도에도 올레길 같은 걷기 루트가 있지만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어디에 길이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어쨌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중교통환승과 별 상관없이 뻗은 걷기 길을 마냥 걸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차도를 따라 걷는 일이 더 많았지만, 제주도보다 훨씬 나은 점이 있다면 차량 통행량이 많아 어지간한 차도는 거의 다 위험하다고 느껴지게 된 제주도와는 달리, 진도는 차도에 다니는 차가 거의 없었다. 진도대로 정도만 차량 통행량이 많다는 게 느껴지지만 제주도의 3분의1도 채 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거닌 길은 샛길에 가까운 도로였다. 가을 아침에 잘 포장된 도로를 차 없이 걷는 기분이 좋았다. 진도의 바닷가나 산의 바위에 가보면 특징적인 바위색, 뭐랄까 약간 불그스림한 느낌의 잿빛을 띄고 있는데 응회암인지 반암인지는 잘 모르겠다. 길을 걷다보면 그런 색깔을 띈 바위산을 볼 수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텅빈 논과, 짙푸른 배추밭을 걷는 내내 보았다. 진도는 안쪽으로 들어서면 여기가 섬이 맞나 싶게 그냥 평범한 농촌의 풍경이다. 소득수준이 이웃한 완도보다 낮고, 인구도 거의 절반 가깝게 적다는데, 완도는 김을 비롯한 각종 양식과 수산업으로 상대적으로 소득수준이 높다고 했다. 농업이 어업보다 소득을 올리기 어렵다는 걸 이런 식으로 또 알게 되었다. 그래도 바닷가에 닿을듯 말듯한 길을 따라 걷다보면 섬답게 간간히 바다가 보였고 자그마한 크기의 부두에서는 사람들이 비릿한 짠내가 풍기는 그물을 바닥에 널어다 말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뒤에서 덜덜거리는 전동휠체어 끄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길지는 않았지만 3분 정도 내내 뒤에서 따라오는데 뒤를 보지 않고 걸을 때는 이 꾸준히 이어지는 전동휠체어 소리가 약간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3분여가 흐르고 이 대치는 곧 끝났는데, 일부러 천천히 걷는 사이 휠체어를 탄 무표정한 할아버지는 나를 추월한 다음, 머지않아 나타난 부둣가에서 마침 바닥에 그물을 널던 다른 주민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남쪽을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감이 무지막지하게 많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오렌지나무를 보는 것과 같이 한국은 사실 감이 정말 흔해빠진 나라긴 하다. 심지어 서울조차 대흥동이나 삼청동 같은 도심 한복판의 동네에서도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린 걸 볼 수 있을 정도인데 남쪽은 차원이 다른 것 같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감나무에 감들이 어찌나 많은지, 심지어 하천변에도 아무렇게나 감나무에 감이 열려있는데 감이 대체 얼마나 잘 자라는 조건인 진 몰라도, 배나 사과는 야생화된 것같은 나무들의 열매들은 작고 볼품없는데 여기는 모든 감들이 다 너무 실하고 훌륭해서 이상하다. 제대로된 감은 접을 붙여야 나오는 거니까 분명 심었을 때는 의도를 갖고 접붙이기를 했을 건데 어쩌다가 이렇게 버려지듯 방치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방치하듯 재배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지금 계절이 한창 감이 수확될 시기라서 그런지 몰라도 직거래코너에 나온 감은 그야말로 헐값이었다.
진도에도 감은 흔했는데, 그래도 감을 따먹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길을 걷다가 길가에 저절로 자라난 것처럼 혼자 우뚝 솟아 덩굴이 감긴 무화과 나무를 보는 순간, 이건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파파야지만, 홍옥과 무화과도 내가 매우 사랑하는 과일이다. 사랑한다고 자주 먹지는 않고 정말 좋은 맛이 나는 걸 잘 고르려고 한다. 그러나 서울에서 맛있는 무화과 먹기는 쉽지 않고 가격도 싸지는 않다.
11월도 초순이 지났지만 이곳의 무화과들은 익기는 커녕 알이 채 여물지도 않았다. 사실 진도는 단풍이 오려면 아직도 보름여는 더 기다려야 할 정도로 서울보다 찬 계절이 훨씬 늦게 찾아온다고 한다. 영암 무화과는 8월부터 나오는데, 길가에서 자라는 무화과들은 아직 익은 게 별로 없었다. 버려진 듯한(이라고 믿은) 무화과나무에서 조금이나마 알이 커진 무화과를 따다 먹었더니, 분명 안 익었지만 그럼에도 달달한 맛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다시 만난 무화과 나무의 무화과들은 그보다 좀더 알이 컸다. 밑둥 쪽에 파는 것과 같은 정도로 큰 무화과를 보았고 나는 그것을 땄다. 만져보니 부드럽게 무른 느낌이 났는데 한 입 베어물었더니 그간 내가 먹어본 무화과와는 다른 농도의 달콤함이 느껴졌다. 보통 달착지근한 맛이 날 정도의 무화과는 너무 물러서 시럽같다고 느껴질 정도인데, 이 무화과는 적당히 쫄깃한 식감이 나면서도 차원이 다른 달콤함과 짙은 코코넛향이 나는 것이었다. 지난 9월 말에 먹었던 함양의 홍옥과 더불어 진도의 길가에서 먹은 무화과는 요 근래 몇년 간 먹은 과일 중 손꼽을 정도로 맛있었던 것으로 기억할 거다.
이날 걸은 길은 이번 여행 중 가장 좋았다. 내가 늘 즐기던 여행이었고 그것을 오랜만에 누려서 반가웠다. 하지만 요즘에 이런 식으로 걷는다는 게 얼마나 많은 마음을 들여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근데 정말 좋았다고 느낀 건 가을 아침 볕에 만난 무화과의 맛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음에 다시 이런 식으로 걷게 될지는 모르겠다. 여행을 할 때마다 시행착오를 겪는데 그때마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것, 걸러야 할 것들을 결심하게 되지만 다음에 가서 이런 앞서의 '지혜'를 따르기보다는 다시금 시행착오에 스스로를 맡기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좋은 기억들이란 게 그 시행착오 속에서 나온 것들이기도 하다. 버스 놓치고 되는대로 걷다가 길가에서 무화과를 만날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