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해 전 대선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으로 글을 남기게 되었다. 선거 직후의 감상이라는 것이 흔히 그렇지만 우리 정치 현실에 대해 상당한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사실 지난 대선 때 진보 진영 지지자가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의 감정일 것이다.
선거 직전의 기사에서 여당 측의 불안감이 감춰지지 않고 있어 덩달아 불안해지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래도 여야가 비등한 수치를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판이었던 셈이다. 정치 평론가가 아닌 마당에 그 이유를 훤히 설명할 실력은 못 된다. 다만 지난 대선의 첫 번째 전제가 정권 심판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총선의 첫 번째 또한 정권 심판이었다는 점, 그리고 과거 진보 진영 측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부르던 유권자 성향이 지지난 총선 무렵을 기점으로 반대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다는 점, 두 가지를 지적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20대에 불과하기는 하나 8년 전의 2016년 총선은 내가 경험한 선거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선거의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여야의 균형을 이루는 데 성공하면서 정부에 대한 적절한 비판의 메시지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앞뒤로는 각각 2012년도의 총선과 2020년도의 총선이 놓여 있다. 이 당시 여당과 야당의 공과는 비슷한 수준을 이루고 있었다. 오히려 당시 각각의 여당이 상대적으로 적은 선택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상당한 수준의 의석 수를 당시의 여당이 더 가져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정치 현실의 기반이 2012년경까지는 엇비슷하게 보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가 점차 변화되어 2020년경 이후로는 엇비슷하게 진보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한국 사회의 바탕은 여전히 진보 쪽이 비교 우위를 이루고 있으며, 상황에서 문제가 없지 않은 정부의 정책 진행이 더해지면서 야당 압승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현 정권의 정책 기조가 변화를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이번 총선의 유일한 긍정적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방향성이 이분법적이라고 해서 진행해나가는 과정까지도 이분법적일 필요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다른 선택지를 통해 충분히 정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전체 선거의 분위기 때문에 개별적인 인물 경쟁력이 힘을 못 쓰게 된다는 것은 그 당위성에 비해 비합리적인 면이 더 많다. 그런 면에서 보수 진영 지지자로서 낙선이 아깝게 생각되는 후보가 너무도 많다는 것은 착잡하게 생각된다. 그러나 더 큰 착잡함은 승리를 거둔 야당 쪽의 면면에서 비롯된다.
정부 여당에 문제가 많다면 야당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민주당에 대안으로서의 면모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보수 정당이 3.10 사태 이후 점차적인 변화를 모색하면서 대안으로서의 성격을 인정받았던 것처럼, 민주당 역시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는 급진적, 극단적 경향이 청산되지 않는 한 대안으로서의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번 선거에서 야당이 우위에 서더라도 압승은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겨졌던 것이고, 총선 이후 이재명 대표가 2선으로 물러나면 민주당에 그러한 혁신이 이루어질 것이라고까지 예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권 심판이라는 첫째 의제 때문에 그것가지는 고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회초리를 더 강하게 들기 위해 지금의 민주당 주류를 선호하고 또 압도적 지지를 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급진성의 선택이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그 이후의 과정에서는 또 다른 문제들이 벌어질 가능성이 너무나 농후하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지겠만 괜히들 혁명보다 개혁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야당의 주류는 개혁에는 큰 관심이 없고 혁명 놀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기에 나로서는 그들을 대안으로 선택할 수 없겠는 것이고, 지금의 여당의 주류는 그보다는 그래도 사정이 나았기 때문에 그들의 상대적 선전을 바랐던 것이다.
요컨대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는 사실 자체는 나를 우울하게 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당선자들의 구체적인 면면에 있다.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지만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가장 큰 문제의 하나인 언어의 저급화와 천박화를 앞장 서서 실천하는 진보 진영 주류의 적지 않은 인물들 --이런 자들을 꼽는 데 열 손가락이 모자라다는 것만으로도 현재 진보 진영 주류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거니와-- 이 거의 빠짐없이 국회에서 다시 설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이를 비판하는 자리에 가서 악전고투한 이들은 거의 아무도 그 자리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이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오늘의 선거 결과에서 가장 불행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제3지대의 득표 결과이다. 사실 이번 제3지대의 실패 하나만으로도 유권자의 성향이 말이 바른 의미에서의 '진보적'인 것이 아니었음이 확실해진 셈이기도 하다. 제3지대의 중요성을 제창했던 개혁신당이나 새로운미래를 개인적으로는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유권자들이 정치 현실의 변화를 원했다면 적어도 비례대표 선거에서는 마땅히 그들이 선전했어야 했다고는 생각한다.
사실 지난 대선과 동일하게 나는 이번의 비례대표 선거에서 녹색정의당에 투표하였다. 나는 녹색정의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지난 4년 동안 그래도 설득력을 지닐 만한 정치적 행보를 보여 왔고, 그런 그들이 제3지대의 중심은 커녕 변방도 바깥으로 몰려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었다. 범진보 성향의 정당 가운데 진보당의 입지 확대는 차치하더라도 녹색정의당의 입지가 이 정도로 축소된 것은 진보 성향을 자처하는 이들이 많은 우리 정치 현실에서 어떻게 보면 기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여론 성향이 진보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이른바 3당의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되는 정당의 득표 결과가 명확하게 증거해 준다. 단언하건대 그 정당은 우리 정치사에서 유신정우회 이후 최악의 정당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그 정당의 약진은 유럽에서 극우 정당이 세를 넓혀 간 과정과 매우 유사하기도 하다. 우리는 가령 지난 국회에서 열린민주당 출신의 거의 모든 국회의원들이 한국 정치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한 것을 본 바가 있다. 차기 국회에서 확실한 것은 이 정당을 중심으로 그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흔히들 정치의 수준이 지금보다 떨어진 적이 없다는 식의 얘기를 하곤 한다. 정치 피로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흔히들 하는 수사라고 생각한다. 4년 전이나 8년 전이라고 해서 정치의 수준이 지금보다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선거 결과가 이렇게 나왔다고 해서 한국 정치의 수준이 반드시 더 떨어질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지금보다 나아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대안으로서의 면모가 부족한 민주당 주류가 더욱 공고화되었고 극단주의 세력이 3당을 챙겨 갔기 때문이다. 야당이 압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압승했기 때문에 한국 정치는 여전히, 계속 불행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