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중심으로 보는 초판 『문화재대관』

by 노정연
손명예 애.jpg 손명예, 〈애(愛)〉, 1957년, 크기, 소재 및 소장처 미상


예술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생애를 발굴하는 것은 즐거운 일인 동시에 난감한 일이다. 1957년 '국전'에서 〈애(愛)〉라는 작품으로 부통령상을 수상한 손명예(孫明藝, 1933-?)도 그런 인물 중의 하나였다. 이 인물에 대해 알아보면서 우선 막연했던 것은 그의 이름을 '孫明芸'으로 적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운(芸)' 자가 '예(藝)' 자의 약자로 많이 쓰이기 때문이었는데, 모르는 입장에서는 어감상 '명예'라는 특이한 이름보다 '명운'이 훨씬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구열(李龜烈, 1932-2020) 같은 분도 말년의 저술에서 그의 이름을 헷갈리고 있는 듯하다.(1) 손명예의 부친이 그 유명한 손재형(孫在馨, 1902-1981)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이름을 확정짓는 데만 상당한 공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芸' 자가 '藝' 자의 약자로서 쓰이지 않는 것은 다른 데서 볼 수 있다. 가령 화가 허민(許珉, 1911-1967)은 호를 운전(芸田)으로 삼았다. 그는 공필(工筆)의 세계를 본령으로 삼았던 김은호(金殷鎬, 1892-1979) 문하 출신의 화가로서는 특이하게 문인 지향적인 가치관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가 '芸' 자를 호로 쓴 것도, 풀을 벤다는 의미에서 착안해 자신이 화가 이상으로 일종의 문인이고자 했던 의도를 드러낸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2)


호에 '芸' 자를 사용한 또 다른 인물로 뜻밖에 알게 된 인물이 바로 서예가이나 사실상 정치인으로 더 잘 알려진 윤제술(尹濟述, 1904-1986)이었다. 그는 1936년의 마지막 서화협회전에서 〈행서동파시(行書東坡詩)〉가 입선하면서 사실상 등단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이후로는 다른 분야에서의 행적이 그의 생애에서의 비중을 압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그가 대중적으로 서예가를 겸한 정치인이라는 각인을 남기고 있는 데에는 이른바 광화문 현판에 대한 일화의 주인공으로 회자된 영향도 없지 않다.


1968년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광화문의 현판을 박정희가 쓴 글씨로 올렸는데, 준공식 자리에 참석한 윤제술이 그것을 권력자가 쓴 것인지 모르고 어떤 놈이 글씨를 저 따위로 썼느냐고 분개했다가 주변도 당황시키고 본인도 당황시켰더라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비화가 흔히 그렇듯이 이 이야기 또한 출처는 오리무중이다. 윤제술의 문집인 『운재선집』을 뒤지면서 그의 호까지 알게 된 것도 그 출처를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윤제술의 실화인지 아닌지 모를 이 일화를 떠올리는 것은 1967년에 나온 『문화재대관: 국보편』의 첫머리에 박정희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서예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의 2인자였다는 김종필의 그림이 그렇듯이 제대로 된 서예가도 아닌 역대 대통령의 서예를 진지하게 논평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우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비전문가의 눈으로 보더라도 '온고지신'은 너무 삐뚤빼뚤한 글씨라는 인상을 준다. 그것이 첫머리에 새겨진 책이 다름아닌 국보의 자료집이다 보니 그 우스꽝스러움은 배가된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재대관'이라는 책이 처음 나온 것은 1967년의 일이다. 그 이전에 6권으로 된 『국보도록』이 1957년에 출간된 바 있으나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의 시행과 함께 분류 체계가 조정되었고 국보, 보물보다 하위 분야까지 포괄할 필요성이 있어 새 책을 내게 되었다고 '발간사'는 밝히고 있다.(3) 1967년의 '국보편' 이후 1971년까지 세 권으로 된 '보물편'이 나왔고, 다음 권들이 느릿느릿하게 출간되어 마지막 권인 '중요민속자료' 편이 1980년대에 출간되었다.


문화재대관은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쳐 2000년대 이후 새로운 편집으로 출간되고 있는데 오늘날 익숙한 것은 이 개정판일 것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국보편의 경우 회화와 조각(2007), 금속공예(2008), 전적(2009, 2010), 도자기 및 기타(2011)가 차례로 출간되었고 이어서 보물편이 10여 권 정도가 출간된 상태이다. 1960년대에 시작된 책명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전통 깔아뭉개기를 능사로들 생각하는 우리 사회에서 드문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 앞으로 나올 책들은 '문화유산대관'으로 이름이 바뀔 듯하다.


초판 『문화재대관』의 국보편과 보물편에서 첫머리를 차지하는 것은 목조건물과 석탑 등 넓은 의미에서의 건축물이다. 이어 불상 조각이 다음 자리에 있고, 석비(石碑) 등 석조물에 이어 금속공예와 도자기 등 공예 분야가 다음 자리, 전적 및 회화가 마지막 자리에 놓여 있다. 회화의 비중이 극히 낮음을 대번에 알 수 있다. 현재의 편집에서 회화 분야가 단권으로 분리되어 나간 것을 생각할 때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 회화사에 대한 규명이 1960년대 당시로서는 미진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초판의 '국보편'과 '보물편'에서 회화 또는 서예에 해당하는 작품들만을 추려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바꿔 말하면 1970년경까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서화를 모두 합치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참고로 1970년 당시 지정되어 있던 국보는 총 130여 점이었고 보물은 500점이 조금 넘은 상황이었다. 1971년에 김홍도의 《군선도병풍》과 신윤복의 《풍속도화첩》이 국보로 지정되기 직전이었다.


※ 『문화재대관: 국보편』 제7장 전적 및 회화 (118번~126번)

120) 부석사 조사당 벽화 (국보 제46호)

125) 익재 영정 (국보 제110호)

126) 회헌 영정 (국보 제111호)


※ 『문화재대관: 보물편(下)』 제3장 전적 및 회화 (49번~99번)

70) 부산진순절도 (보물 제391호)

71) 동래부순절도 (보물 제392호)

79) 해남윤씨가전고화첩 (보물 제481호)

83)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보물 제485호)

84) 약포 영정 (보물 제487호)

87) 성종기유선사 장말손 영정 (보물 제502호)

89) 도산서원도 (보물 제522호)

93) 해동명적(상권 20매, 하권 23매) (보물 제526호)

94) 단원풍속도첩(25폭) (보물 제527호)

95) 퇴도선생필법 1책 부(附) 퇴계선생유첩 (보물 제548호)


※ 『문화재대관: 보물편(下)』 제4장 일괄유물 (100번~103번)

103) 예산 김정희종가 유물 일괄 (보물 제547호)




1960년대까지 국보로 지정된 회화는 불과 세 점으로 모두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원대 화가의 솜씨인 〈이제현 초상〉을 차치한다면 〈안향 초상〉과 〈부석사 조사당 벽화〉는 고려시대에 그려진 초상화와 벽화 가운데 가장 대표성을 인정받은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부석사 조사당 벽화〉의 도판을 오른쪽부터 나열하면서 그 사천왕의 순서를 다문천, 광목천, 증장천, 지국천으로 적고 있다는 점이다.(4) 이 사천왕의 순서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여러 학설 가운데 어느 쪽을 확실하게 승리했다고 보기가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다.


보물편의 목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모든 회화 작품을 뒤엎고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가 가장 먼저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점이다. 지방 화가의 작품이 문인화가와 화원화가의 작품을 앞서 상석을 차지한 셈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 작품들이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화라는 의의에서 기인한 면이 크다.


문화재대관2.jpg 문교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대관: 보물편(하)』, p. 273.


그 다음으로 지정된 것이 윤두서의 작품들이 담긴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일괄'이다. 부채 그림을 모은 《가전보회》와 일반적인 소폭 그림들을 모은 《윤씨가보》 등 두 개의 화첩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특이한 것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 윤두서의 자화상까지 도판으로 싣고 있다는 점이다.(5) 〈윤두서 자화상〉이 국보로 지정되는 것은 이때로부터 10여 년 뒤의 일인데 여기서는 일종의 참고도판으로 실은 것이리라 생각된다.


총 60여 점의 작품이 실려 있는 그의 두 화첩에서 도판으로 가려 실린 것은 《가전보회》에 있는 〈희룡행우도〉, 그리고 《윤씨가보》에서 〈주마상춘도〉, 〈춘강수적도〉 두 점이 있는 양면이다. 설명으로 보아 아마도 윤두서가 말 그림, 그리고 용 그림에 능했다는 기록을 고려하여 나온 선택이 아닐까 생각한다.(6) 현재의 『문화재대관』에는 〈희룡행우도〉가 살아남는 한편으로 윤두서의 대표적 풍속화인 〈선차도〉와 〈나물 캐는 여인들〉 등이 실려 있다.(7)


공신 초상인 〈정탁 초상〉과 〈장말손 초상〉은 모두 해당 인물의 유물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작품인데, 전자는 조선 중기인 17세기 초, 후자는 조선 초기인 15세기의 초상화 양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들 이후 1972년에 〈유근 초상〉이 보물로 지정된 것을 비롯해 다수의 초상화가 국보, 보물로 지정된다.


그 다음에 해당하는 것은 강세황이 중년에 접어드는 무렵에 그린 〈도산서원도〉이다. 강세황의 여러 작품 중에서 이 작품이 우선적으로 중요시된 것은 설명으로 보아 아마도 도산서원이라는 소재와 관련된 맥락 때문이었을 것이다.(8) 강세황의 작품은 이후 1975년에 그의 자화상이 부친인 강현 등 일가 초상화와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고 의외로 다른 작품들은 지정된 바가 거의 없다.


문화재대관1.jpg 문교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대관: 보물편(하)』, p. 319.


그 다음으로 보물로 지정된 작품은 김홍도 전칭의 그 유명한 《풍속도화첩》이다. 김홍도의 많은 작품을 제치고 이 화첩이 가장 먼저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오늘날 김홍도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 현상을 생각할 때 시사적일 수밖에 없다. 근래에 들어 이 화첩은 김홍도의 진품이기보다 작가가 불확실한 넓은 의미에서의 김홍도 계통의 풍속화로 보는 게 적절하다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김홍도 작품 중에서는 앞서 말한 《군선도》가 국보로 지정된 데 이어 1984년에 《병진년화첩》이 보물로, 2000년대 이후 《추성부도》 등등이 잇따라 보물로 지정된다.


앞선 윤두서의 경우처럼 이 화첩 역시 대표 도판 두 장을 골라서 싣고 있는데, 하나가 유명한 '서당'이 있는 면인 데 비해 다른 하나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나들이'와 '시주'가 있는 면을 고른 점이 독특하다. 물론 '나들이'의 소재가 서로 움직이는 시선이 맞부딪치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작품이기는 하다. 현재의 『문화재대관』에서는 화첩 속 25점 전체의 도판을 모두 싣고 있다.(9)


이 밖에 뒷날 '이황 필적'으로 묶이게 되는 《퇴도선생필법》 및 《퇴도선생유첩》이나 '김정희 종가 유물'에 포함된 《금반첩》, 《심경첩》 등 각종 필적은 서예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작품들이다. (나중에 내가 아주 출세를 해서 진보 정권에 부역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말은 삼가겠지만, 문화유산 지정번호의 폐지로 인해 이런 일괄적 성격의 문화유산을 헤아리기가 완전히 헷갈려버리고 말 때가 너무나 많다.) 특히 김정희의 경우 이후 1974년에 〈세한도〉가 국보로, 2010년대에 〈불이선란도〉, 《난맹첩》 등이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 무렵의 목록을 보면서 가장 놀라운 점은 조선 후기의 최대 거장인 정선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국보, 보물의 목록에 정선의 작품이 오르는 것은 당시로부터 훨씬 늦은 1984년에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가 국보로, 1986년에 〈육상묘도〉가 보물로 지정된 것이 효시이다. 이후 2010년대에 들어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풍악도첩》 등이 잇따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앞서 말한 당시 회화사 연구 실태의 미진함이 세부적으로는 특히 산수화 쪽에 손해를 많이 입힌 혐의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1) 이구열, 「국전 30년 개관」, 『청여산고』2(에이엠아트, 2018).

2) 허만하, 「천의 얼굴과 하나의 얼굴」, 『운전 허민 서화집』(국제신문사, 1977), p. 135.

3) 문교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대관: 국보편』(1967), p. 11.

4) 문교부 문화재관리국, 위의 책, pp. 464-471.

5)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대관: 보물편(하)』(1971), p. 244, p. 246.

6)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위의 책, p. 271.

7) 문화재청, 『문화재대관 보물: 회화 1』(2018), p. 26, p. 30.

8)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앞의 책, p. 304.

9) 문화재청, 앞의 책, pp. 4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