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 복돈기사식당
지금은 사라진 지명(地名) 중에 유난히 '이리(裡里)'라는 지명을 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둔 적이 있다. '이리'라는 단어의 어감이 주는 묘한 이질감과 독특한 분위기에서 신비로움을 느끼기도 하기 때문. 게다가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지만 '개'과에 속하는, 지금은 멸종 위기에 처한, 늑대나 개와 비슷한 동물을 부르는 호칭에도 '이리'라는 말이 있었다. 초빼이가 국민학교 시절 '똘이장군'같은 반공 만화영화에서는 북한군이나 북한 사람들을 '이리(승냥이)'가 변신한 것으로 묘사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80년대에 태어난 분들의 기억에나마 어렴풋이 남아있을 '이리'라는 지명은 원래는 전주부 옥야현이었다가 전주에서 분리되어 익산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1911년 익산군청의 이전과 1912년 호남선과 군산선이 개통되며 이리역이 생겼다. 그리고 20여 년 후 익산면이 익산읍으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이리읍으로 명칭이 바뀐다. 1947년 이리읍이 이리부로 승격되며 익산군에서 분리가 되었고 1949년 이리시가 되었다. 그리고 1995년에는 이리시와 익산군이 행정구역 통합을 하며 익산시로 개칭되었다.
하지만 이리가 우리의 기억에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긴 것은 1977년 있었던 이리역 폭발사고 때문이다.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현 한화) 소속의 화물 열차가 다이너마이트 등의 폭발물을 싣고 이리역에서 발차를 대기하던 중 대형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한국 철도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사고로 기록된 이 사고는 엄청난 인명 피해와 당시 추산으로 약 23억 원의 재산 피해를 낳았던 대형 사고였다. 그 사고로 인해 이리시는 모두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뜨거운 햇빛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8월 어느 날, 식당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뜬금없이 '이리시'라는 단어가 운명처럼 튀어나왔다. "혹시 이리역 폭발사고 아세요?"라는 사장님의 말로 시작된 대화는 "그즈음 내가 이리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어요"라는 말로 이어지며 그 길이를 늘였다.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오던 때"였다며 "나도 상경해서 직장을 다니다 식당을 시작했다"며 이 식당의 시작을 풀어주셨다. 옆으론 조금씩 김을 피워 올리는 불백과 장어덮밥 냄비가 달궈진 몸을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한다.
기사식당은 보통의 식당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몇몇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우선 여유 있는 주차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빠른 시간 내에 음식을 조리해서 내야 한다. 게다가 맛은 기본이다. 까칠해질 대로 까칠해진 기사님들의 입에 부담 없이 통할 정도로 기본적인 음식 솜씨는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식당 내에서 밥을 먹고 후식(보통은 자판기 커피나 커피믹스이지만)까지 해결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택시 기사들의 삶이 시간에 쫓기는 삶이다 보니 한 공간에서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하도록 꾸며, 1초의 시간 낭비도 없도록 구성해야 한다. 이 집도 오밀조밀하게 이런 것들이 모두 가능하게 꾸며 놓은 집이다. 그래서 택시기사 손님들이 꽤 많다.
강남이지만 강남 같지 않은, 송파구 삼전동의 주택가에 자리 잡은 '복돈기사식당'은 아주 오래전부터 돼지불백과 장어덮밥으로 유명한 기사식당이었다. 원래 상호명은 다래기사식당이었지만 사장님의 단순 변심('다래'라는 이름이 너무 지겨워서)에 의해 '복돈'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복 많이 받으시고 돈 많이 버시라는' 누구나 추측 가능하지만 무게감 있는, 그런 의미를 담은 상호다. 메뉴는 예전 다래기사식당때와 별반 달라진 것도 없다. 게다가 사장님이 오래된 전골냄비에 돼지불백이나 장어덮밥 재료를 담아 불까지 피워주면 나머지는 손님이 알아서 만들어 먹어야 하는 서비스 방식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번거롭다 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형태이다.
가게로 들어서면 비어 있는 테이블로 가 자리를 정한 후 메뉴를 선택하고 주방에서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장님에게 다가가 주문하면 된다.(물론 가끔 사장님이 밖에 나와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돌아서서 찬을 담는 접시에 적당량의 찬을 올리고 밥과 국을 담아 자신의 테이블로 오면 몇 번씩 움직이지 않는 효율적인 동선을 만들 수 있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면 사장님이 오래된 전골냄비를 테이블 위의 화구에 올리고 불까지 올려준다. 냄비 속 음식들이 조금씩 달아오르면 함께 내준 작은 국자와 집게로 골고루 익혀 입에 넣는다. 사실 복돈의 메뉴는 불백과 장어덮밥 이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지만 95% 정도의 손님들이 이 두 메뉴에 집중한다. 그만큼 맛있고 매력적인 음식이다. 가끔 불백의 간장 양념이 지겨운 분들이 제육볶음을 주문하기도 하지만 그리 흔치는 않다.
초빼이는 이 집의 메뉴 중 장어덮밥을 굉장히 좋아한다. 다른 이들처럼 몸보신이나 보양으로 찾기보다는 가끔, 아주 가끔 고기의 식감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 집의 장어덮밥을 머리에 떠 올린다. 게다가 요즘의 장어구이 값이 초빼이의 형편으로는 도저히 근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울 때가 많은데 복돈 기사식당의 장어덮밥은 이런 부담까지 덜어주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두터워지지만 초빼이의 지갑은 주인과는 반대로 한없이 얇아지고 있으니 이 또한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복돈의 음식은 조리하는 방법도 간단하다. 불 위에 올려진 냄비가 들썩이기 시작하면 국자나 집게를 들고 골고루 익을 수 있게 계속 놀려주면 된다. 스르륵 피어오르는 김을 타고 맛있는 고추장 양념이 조금씩 타들어가며 눌어붙는 냄새가 느껴진다. 양념이 눌어붙는 향이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이 향인가?
"조금 더, 조금 더" 마음속으로 외치며 조금 더 집게를 놀린다. 양념이 눌어붙는 향은 조금씩 그 부피를 키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그 몸집을 키워나가는 듯하다. 적절한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타는 냄새가 나기 직전까지 몰아붙여야 한다. 코너에 몰아붙인 복서처럼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고 사정없이 공략해야 한다. 숨이 목까지 차오르기 직전, 버너의 불을 끄고 한숨 돌린다. 드디어 장어덮밥 완성.
장어덮밥이라 부르지만 고추장 장어구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초빼이는 장어를 밥에 올리거나 비빔밥 그릇에 넣고 비비지 않기 때문이다. 밥 숟가락에 장어를 올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젓가락으로 한 점씩 집어 먹거나 상추에 콩나물과 마늘을 함께 올려 쌈으로 먹는다. 그러니 초빼이에겐 당연히 이 메뉴는 장어구이일 수밖에 없다. 11시쯤 찾아갔지만 비어있던 테이블은 금세 기사님들로 가득 찬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출근길 첫 끼니일 수도 있고, 어쩌면 퇴근 전 먹는 아주 늦은 저녁이 될 수도 있을 테다.
8시간 넘게 좁은 운전석에 앉아 손님을 태우며 회사에 납부해야 할 '사납금'은 채웠는지, 가스 충전비를 제외하고 남은 돈은 얼마나 될지, 그 남은 돈을 모아 이번 달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같은 많은 생각과 고민이 저분들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을 시간이다. 그들의 하루를 돌아보고 내일을 준비할 시간이다. 그래서 이 집의 맛있는 식사 한 끼가 중요하다. 좋은 가격에 퀄리티도 나쁘지 않은 장어구이나 돼지 불고기를 밥에 올려 한 술 뜬다. 그 한 술은 열심히 살았던 오늘에 대한 보상이자 내일 하루를 살아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되어 그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이 집에서의 한 끼는 다른 식당에서의 한 끼 밥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 집의 식사는 자연스레 택시 기사님만을 위한 만찬의 장이 된다. 만찬장이지만 꽤나 소박한 만찬이다. 때로는 혼자만의 만찬이, 때로는 미리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동료들과 함께 찾는 모두의 만찬이기도 하다. 고된 오늘을 찬란하게 빛나도록 치켜세우고 더욱 찬란할 내일 하루도 견고하게 버틸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한 파티가 된다. 가끔 초빼이와 같은 이방인도 한 번씩 그들의 만찬에 슬그머니 발을 들이민다. 이 소박한 만찬은 굳이 강남이나 파주의 그 유명하고 비싼 장어집일 필요도 없다. 단돈 만 원짜리 한 장이면 세상 보기 힘든 양념 장어와 돼지 불고기를 맛볼 수 있는데 그곳까지 애써 찾을 필요가 있을까? 전북 이리 출신 사장님의 손 맛이 이 소박한 만찬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든다.
꼼꼼히 후식까지 챙긴 기사님들의 얼굴이 이 집을 들어설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들의 만찬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음을 이 집을 나서는 그들의 얼굴에서 느낄 수 있다. 초빼이도 이 집의 만찬에 진한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후식은 건너뛴다. 기사님들이 후식 하나라도 더 챙길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 그들의 만찬장을 찾은 낯선 이방인의 바람직한 자세라 생각한다.
오늘도 맛있는 일상(日常)이었다.
* 참고 1. 초빼이의 노포일기 - 경인편, 지방편은 전국 대형서점 오프라인에서도 구입 가능합니다.
- 9월 17일 기준 [예스 24] 음식에세이 분야 판매량 2위, 5위를 나란히 차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참고 2. 초빼이의 노포일기 출간기념 북토크가 9월 21일(토)에 진행됩니다.
이제 몇 자리 남지 않았습니다. 자세한 내용과 신청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메뉴추천]
1. 1인 방문 시 : 장어덮밥 또는 돼지불백 + 소주
2. 2인 이상 방문 시 : 장어덮밥 + 돼지불백 + 소주
3. 3인 이상 방문 시 : 장어덮밥 + 돼지불백 + 동태찌개 + 소주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매장 앞 주차 가능(5~6대)
2. 월~토 08:00~21:00 / 매주 일요일 정기휴무
3. 참고
- 초빼이는 보통 평일 11시경 방문하는 편이다. 이 시간에 찾으면 한가하다.
- 장어덮밥은 강추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원산만두, 부일갈매기, 유천냉면, 본가설렁탕, 송파감자국, 황산냉면, 보성각, 태양의집,
프라자손칼국수, 유원설렁탕, 조박사토종순대국, 수원집, 마포숯불돼지갈비(마포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