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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Nov 04. 2024

9. 정글을 지배한 영국판 트로이의 목마(上)

친디트, 버마 적진 한가운데 침투한 영국군 부대 (1942~1945)

이동 중인 친디트 부 대원들

“우리는 윈게이트의 주술에 걸렸고 점차 그가 얘기하는 작전의 현실적인 가능성과 환상 속에서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 초기 친디트 회의론자였던 <친디트 16 여단> 부대장 버나드 퍼거슨 -



2015년 2월 초 영국 언론에는 영국군의 새로운 부대 창설에 대한 뉴스가 올라왔다. ‘77 여단’이라고 불리어질 이 부대는 군부대이지만 직접적인 전투와 관련이 없는 부대였는데 다소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창설되었다. 부대는 당시 마구 확장되고 있던 사이버 세계에서의 정보 수집 및 대응을 목적으로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당시 러시아, ISIS 및 하마스 등 여러 국가 또는 적성 단체 등에서 온라인을 이용한 정보 수집은 물론 신병 모집까지 하고 있던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부대는 1500명의 병력을 모집할 계획이었는데 현역 군인과 일반인들 중 온라인과 SNS 등에 능통한 이들을 대상으로 모병 활동을 진행 중이었다. 사실 ‘제77여단’이란 부대 번호는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남아시아의 버마(현재의 미얀마) 전선에서 싸웠던 영국군 ‘77인도보병여단’인 일명 ‘친디트 부대(The Chindits)’를 기념하기 위한 작명이었다. 친디트 부대는 당시 일본군이 우글거리는 버마의 빽빽한 밀림 속으로 몰래 침투하여 작전을 수행했던 부대로서 창의적이고 예상을 뛰어넘는 전술로 유명했다. 신설될 77 여단은 친디트 부대의 허를 찌르는 방식을 현대에 계승하여 ‘온라인 세계의 강군’으로 거듭나기를 바랐던 영국군의 바람을 담았던 것이다. 한편 친디트 부대가 만들어질 당시의 상황은 일본군이 전 아시아와 태평양을 휩쓸고 있었고 연합군에게는 어느 곳을 봐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최악의 시기였다. 특히 일본군에 의해 홍콩, 싱가포르, 말라야(말레이시아) 그리고 버마에서 쫓겨났던 영국은 이러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뼈를 깎는 고민을 하게 되는데 친디트는 그러한 고심의 결과물이었다.


 후퇴의 연속

영국령 버마의 수도 랑군(현재의 양곤)에 진입 중인 일본군 (1942. 3월)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 이후 동남아시아 각 지역을 차례로 공격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중 일본군 제15군은 2개 사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사령관 이이다 쇼지로(五田正次) 중장의 지휘 아래 1942년 1월에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태국의 북부에서 버마 공략을 개시했다. 버마는 중일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국에게 1938년 이후로 미국과 영국의 군수품을 공급해 주는 외부와의 연결 창구이자 생명선이었다. 일본으로서는 랑군과 철도로 연결된 라시오(Lashio)로부터 중국의 쿤밍(昆明)까지 연결되는 이 보급 루트를 반드시 끊고 싶어 했고 이를 통해 중국 전선을 압박할 수 있었다. 더불어 버마는 영국의 보물창고인 인도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일본은 버마를 점령한 후 인도에 진공 하여 인도인들의 독립 의지에 불을 지피고 이들을 일본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이를 막는 영국군에는 토마스 허튼(Thomas Hutton) 중장 지휘 아래 2개 사단(제17인도보병사단, 제1버마사단)으로 방어군을 편성했지만 이들의 전투력은 훈련과 장비가 부족하여 겨우 치안유지 수준이었고 그다지 기대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영국 방어군은 순식간에 ‘살윈 강(Salween: 미얀마 동쪽 태국 국경 부근에 위치한 강으로서 남쪽의 안다만해로 흘러간다)’의 모울메인(Moulmein)까지 후퇴한다. 일본군의 진격이 계속되며 메르귀, 다웨이 둥 여러 해안 도시들이 연달아 점령당했다. 3월 7일에는 버마의 수도이자 교통의 요지인 랑군이 일본군에 함락되었고 영국군은 북쪽의 맨달레이로 사령부를 옮긴다. 영국군은 일본군에게 물자를 남겨주지 않기 위해 초토화 작전을 실시했는데 버마 주요 거점에는 물자를 태우는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이후 영국군 극동지역 총사령관인 아치볼드 웨이벨(Sir Archibald Wavell) 장군은 기존의 2개 사단 외에 M-3 스튜어트(Stuart) 경전차를 장비한 제7기갑여단까지 보강시키며 ‘버마 군단’을 신설했고 반전의 기회를 잡고자 했다. 한편 영국군의 후퇴가 이어지자 자국으로의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한 중국의 장제스(蔣介石)가 지원 의사를 밝히며 중국군을 파병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 역시 싱가포르와 자바에서 2개 사단을 추가로 차출하여 전력을 보강했고 노획한 영국군의 군용 트럭을 이용하여 연합군을 끝장내기 위해 신속히 북으로 진격했다. 3월 24일에 중국군 정예인 200사단과 일본군 55사단이 랑군 북쪽 200km 지점인 따웅우(Toungoo)에서 결전을 치르게 된다. 중국군 200사단은 정예 부대로서의 그 명성에 걸맞게 일본군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초초해진 일본군은 3월 말에 추가로 56사단을 투입해서야 겨우 따웅우를 점령했고 중국군은 자국을 향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버마 동쪽에서 중국군은 그나마 분전 끝에 물러났지만 서쪽의 영국군은 훨씬 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영국의 버마 군단은 4월 중순 중부의 예낭기아웅(Yenangyaung) 전투에서 일본군에 포위되며 전멸할 위기에 놓였지만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출동한 중국군 38사단에 의해 간신히 포위망을 탈출할 수 있었다. 이때 영국군은 대부분의 차량과 장비를 유실하게 되었는데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우기 속에 정글을 뚫으면서 인도를 향해 험난한 후퇴를 지속해야만 했다. 많은 피난민들이 이들의 퇴각길에 함께 했는데 이것은 영국군의 이동 속도를 더욱 더디게 했다. 최종적으로 1942년 5월에 영국군이 인도의 마니푸르(Manipur) 주 임팔(Imphal)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버마를 가로지르며 무려 1600km 이상을 후퇴했다. 인도에 도착한 영국군은 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들이 통과해야 했던 버마의 정글과 습지는 세계 최악의 자연환경 중 하나였는데 대부분의 병사들이 부족한 보급과 열악한 위생 상태로 인해 말라리아, 이질 등의 열대 질병에 시달렸다. 대영제국은 다시 한번 일본이라는 가공할 적 앞에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영국군은 지난 넉 달 동안 마치 연달아 두드려 맞은 권투선수처럼 아시아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었던 인도 주둔 영국 사령관 웨이벨 장군은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바로 이때 웨이벨에게 과거 중동에서 함께 근무했던 한 명의 인물이 떠오르게 된다.


 


기인의 등장

아디스아바바에 백마를 타고 입성하는 오드 윈게이트(Orde Wingate)

2차 세계대전 초기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활약하던 오드 윈게이트(Orde Wingate) 소령은 다소 왜소하고 마른 체형을 가졌는데 전통과 권위를 중시하는 영국군 내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1903년 영국령 인도의 북부 끝자락에 위치한 나이니탈(Nainital)에서 영국군 대령인 아버지 조지 윈게이트(George Wingate)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윈게이트의 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식 교육을 통해 자녀들을 엄격하게 키웠다. 윈게이트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성장했는데 1921년에 영국 ‘울리치 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Academy, Woolwich)’의 포병장교 교육과정에 지원하였고 합격하게 된다. 이곳에서 정규 과정을 마친 후 1923년에 소위로 임관했는데 이후 승마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고 1926년에 육군 승마학교로 전출되며 마음껏 말과 친해질 수 있었다. 윈게이트는 말과는 더없이 친했지만 사람들과는 관계가 좋지 못했는데 고집세고 반항적인 태생적 기질로 인해 많은 선배 장교들과 부딪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성격도 괴팍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다. 1928년에는 아프리카의 수단에 있는 수단방위군에 배속되어 현지의 밀렵꾼들과 노예 상인들을 단속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윈게이트는 여기서 한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는데 순찰을 돌며 단속을 하던 방식을 ‘숨어서 매복을 하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항상 보이던 순찰자들이 보이지 않자 심야의 침입자들은 당황했고 종국에는 인근 수풀에서 매복 중인 윈게이트의 부대원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곤 했다. 그는 1933년에 몇몇 부대원들과 함께 인근의 리비아 사막으로 여정을 떠나기도 했다. 윈게이트는 혹독한 사막에서의 여정을 통해 극한의 장소에서의 생존방법과 인내심을 기를 수 있었고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대원들을 이끌고 통솔해야 하는지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을 할 수 있었다.            


1936년 9월 윈게이트 대위는 영국 위임 통치령인 팔레스타인에 참모 장교로 파견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 지도자들과 친분을 맺기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친분은 정보 장교로서 동향을 파악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시작되었으나 그는 곧 시온주의(이스라엘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에 빠져들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점점 증가하는 유대인 인구와 기존 아랍인들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양 측은 폭력을 통한 살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영국과 유대인에 반대하는 아랍 반군들이 무장투쟁을 시도했는데 윈게이트는 이에 대한 대응을 위해 소규모 ‘유대인 공격 부대’를 창설할 것을 구상했고 영국군 주둔 사령관인 아치볼드 웨이벨 장군에게 보고했다. 이후 재가를 얻은 윈게이트는 하가나(Haganah)와 같은 유대인 무장 단체의 도움을 받아 부대원을 모집했고 이들을 훈련시켰다. 유대인 공격 부대는 실전에서 대단히 호전적이었는데 반군 진압은 물론 일반 아랍인들 마을까지 휩쓸며 무차별로 공격했고 민간인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공격들은 그의 상사들조차도 대단히 잔인하다고 비난했지만 윈게이트는 그 만의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아랍반군 진압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점점 더 친유대적인 정치적 행보를 취했고 더 이상 그의 상관들도 지켜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39년 5월에 윈게이트는 보직해임 당하면서 사실상 영국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물론 그에게서 훈련을 받은 하가나 출신 모셰 다얀(Moshe Dayan: 애꾸눈으로 유명한 그는 1967년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으로 조국을 구하게 된다)과 같은 이들은 자신들에게 전투기술을 알려준 스승이었던 윈게이트의 전출을 대단히 아쉬워했다. 윈게이트는 현재까지도 이스라엘에서 자신들의 국가건설을 지원한 영웅으로 칭송된다.


영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그는 본토에서의 대공 방어 임무에서 벗어나 전투에 참여하고 싶어 했는데 영국군 중동사령부 총사령관인 과거의 상사였던 웨이벨의 추천을 통해 수단으로 오게 된다. 윈게이트는 이곳에서 영국인, 수단인과 에티오피아인 등으로 구성된 소수정예 부대 ‘기드온 특공대(Gideon force: 성경의 ‘사사기’에 등장는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물리친 '기드온'에서 유래했다)’를 창설했다. 이들의 목표는 추축국 이탈리아군이 점령 중인 에티오피아였는데 1941년 2월부터 본격적인 게릴라 활동을 시작한다. 기드온 부대의 주요 목표는 이탈리아군의 방어 진지와 보급로였다. 윈게이트는 이탈리아군에 상당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원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성공적인 작전을 이어 나갔다. 그의 부대는 비록 1700명 정도의 규모였지만 이탈리아 요새를 상대할 때 자신의 부대가 훨씬 많게 보이도록 기만술을 사용하거나 때로는 적군 지휘관에게 협박을 했고 야간의 기습을 통해 적의 허를 찔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훗날 사용될 윈게이트만의 전술이 다듬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전은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결국 자신의 부대보다 10배 이상 많은 이탈리아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1941년 6월에 윈게이트의 부대는 남쪽의 케냐에서 진군한 앨런 커닝햄(Alan Cunningham) 장군의 부대와 합류하면서 에티오피아 전투를 종료하게 된다. 이렇게 동부 아프리카 전체가 영국의 지배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윈게이트의 자식과 같았던 기드온 부대는 해체되고 만다(이후 많은 이들이 영국 8군에 흡수되어 북아프리카 사막 전투에서 활약했다). 그는 이후 카이로로 돌아오는데 자신들의 공적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상관, 동료 및 관료들과 싸우면서 이들을 비난하는 공식 보고서를 런던으로 보냈다. 그의 보고서는 중간에 비난 내용들이 ‘부드럽게’ 각색되어 고위층들에게 전달되었는데 특히 처칠에게는 ‘영웅의 모험담’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반면 이때의 윈게이트는 극도의 우울증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는데 열병에 시달리던 중 한때 자살 시도까지 할 정도로 한계 상황으로 내몰린다. 그는 회복을 위해 영국으로 후송되었는데 이후 윈게이트의 신임 발령을 놓고 영국군 및 고위관료들은 나름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인도 담당 장관인 레오 아메리(Leo Amery: 파시스트인 그의 아들 존 아메리는 반역자가 되어 나치 친위대에 가입했고 종전 후 교수형 당했다)가 ‘인도/동남아 지역 총사령관’에게 윈게이트를 휘하에 둘 것인지를 직접 물었다. 그 총사령관은 이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는데 그는 바로 윈게이트와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웨이벨 장군이었다. 이렇게 해서 윈게이트는 1942년 2월 말에 ‘운명의 땅’이 될 버마를 향해 떠나게 된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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